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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82주년 특집 그날을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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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3호 발행인 안종호 발간일 1999-03-05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특집, 교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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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2 08:07 조회 4,26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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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82주년 특집 그날을 되새기며.....
3.1 운동, 자주 독립과 국권회복의 발로

역사상 우리 민족처럼 고난의 길을 걸어온 민족은 드물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두 피와 눈물과 한숨으로 엮어진 치욕의 역사였다. 외적의 침

입. 내란의 분제, 한때는 국토률 빼앗기기도 했고. 내정의 간섭도 받았으며 끝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던 비운의 민족이었다 .

일제의 국권 강탈로 인하여 애국선열과 독립군이 홀린 피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건국 하는데 초석이 되었으며 민족정기로써 영원히 우리 민족과 함께 물멸할것이다. 또한 3.1 독립군중은 우리 민족의 굳은 기백의 물굴의 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린 민족의 장거였다. 혀 광목후 북한공산당과 대치한 가운데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은 내일을 향한 우리 민족에게 생생한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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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서울 시민(자료제공 : 역사편찬회)

민족 자주 우 자결의 항쟁 ,

3 - 1운동!

독립운동은 경술국치 이전부터 의병 봉기 등 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후 3 - 1운동』이어져 오는 동안 국내외의 각계 각층에서 독립을 위 하여 일제의 잔인한 탄압을 무릅쓰고 독립운동 을 전개하였다. 일제가 침략 악법을 제정할 때 마다 민족의 독립운동가들은 분개하였고, 그것은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민중운동으로 발전되 어 갔으며 신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민족의 각 성을 촉구하는 계몽운동을 통해서 국권을 회복 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10년 한 ·  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항일 독립운동은 애국자로 하여금 국내외에서 독립투 쟁을 전개하도록하였다. 국외로 나간 독깁운동 자들은 곧 적극적인 투쟁을 시작하였으며 국내 에 남은 애국인사들은 암암리에 항일 독립사상 을 고취하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찾고 있었다.

이러할 때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 결주의 발표와 곧 개최되는 파리 강화회의, 또 재일 유학생의 2 · 8독립선언과 고종의 사인불 명 등 항일 기운이 점차 고조되어 드디어 거족 적인 3 · 1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지식층과 종교단체 학생층이 각각 그 계획을 세워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교육의 영향으로 비교적 세계정세에 민감하고 일제의 통치에 비찬적인 지식인  · 종교인 · 학생들은 국립운동 대열에 결속되어 강력한 조직을 앞세워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거족적으로 일제히 봉기하여 전세계에 한민족 의 독립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3 - 1운동의 서막,

2 8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한국인 일본 유학생들은 도오 쿄에 있는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조선 청 년 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 당시 일본에는 조선기독교 청년회. 조선 유학생 학우회, 조선학회, 조선여자 친목회 등의 애국 단체가 있었다. 그 중 조선 유학생 학우회는 1912년 10월 27일에 조직되었으며 ‘학지광’ 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항일사상을 고취 해 왔다. 그리고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 국의 독립을 일본 내각과 각국 공관에 청원할 것을 결의하여 그 실천자로서 최팔용 · 송계백  · 전영택 · 서춘 · -최근우 외 10명을 선출하였으나 전영택이 병사함으로써 이광수 · 김철수를 추가 선출하여 11명이 되 었다. 이들은 독립운동 추진 방법을 협의하여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부와 각국 공관에 보내기로 하는 한편 자금을 모금하고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여 사전에 국내의 지도층과 연락하면서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여 민족대회 소집청 원서 및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국문- 일문¬형문으로 작성하여 2월 8일 각국 공관 . 일본정 부 - 조선총독 우 언론기관과 학자들에게 우송하여 한국 독립의 대의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날 도오쿄의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11명의 대표가 서명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때 일제 경찰이 출동했으므로 맨주먹으로 대항하여 싸웠다. 이같은 2 · 8 독립선언 은 일본의 수도에서 감행했다는데 의의가 있으며 3 - 1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불교계의 3- 1운동 

천도교.기독교.학생측의 개별적인 운동계 획이 통합 단일화 되고 여기에 불교측이 가담 함으로써 독립 선언서에 서명할 민족 대표의 인선이 본격화 되어 대표자33명을 선출하고 거 사일을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독립선언문은 최남선이 초안하여 최린에게 전달되었다. 그 뒤 원고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 인쇄소에서 인쇄되었으며 이것은 2월 27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2만 1천 장이 인 쇄되었다. 그리하여 이 인쇄물은 각 조직에 분 배되어 전국 중요 도시에 살포하기로 하였다. 또 이와는 별도로 독립 통고문을 일본 내각 총리대신과 의회, 언론계, 각 대학과 저명학자에게 우송하였으며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호소문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는 조선총독에게 독립의견서를 전달하기로 하 여 2월 28일 밤까지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하여 거족적인 3 · 1독립운동 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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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 유언 : 두 동생과 홍석구 신부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 (자료제공 :역사편찬회)
3 · 1운동의 진행상황

1919년 3월1일 민족 대표 33인 중29인(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 시각인 오후2시가 되어가자 최린은 태화 관 주인에게 조선 총독부에 전화로 민족 대표 일동이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 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다. 일본 경찰 대 80명은 드디어 통고를 받자 곧 출동하여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민족대표 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식사를 듣고 그의 선창에 대한 독립 만세를 제창한 후 연행 되어 갔는데 대표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일본 경찰이 인도하는데로 자동차에 분승하여 만세소리가 진동하는 서울 거리를 지나 총독부로 연행되어 갔다.

한편 이날 정오 경부터 탑골공원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 학생4〜5천명이 모여 엄 숙한 독립 식전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오후 두 시 정각이 되자 팔각정 앞에서 드디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민족 대표가 예정을 바꾸어 이 식전에 불참하였기 때문에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가서 엄 숙히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군중 속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여 갑자기 탑골 공원은 만세 소리로 천지가 진동하였다. 이것은 한민족 전체의 절규였다. 선언식을 마친 학생 군중은 곧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질서 정연한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이 시위행진은 남녀노소 모두가 가담하였으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밤 11시경까지 서울 일원에서 계속되었다.

이러한 행사는 서울에서만 거행된 것은 아니 었다. 3월 초부터 4월말까지 지방의 각 처에서 계속되었으며 전국의 학교에까지도 파급되어 학생들도 가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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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습격 조선인을 총살하는 일본군. 당시 일본군은 재판없이 즉결로 총살형을 집행하였다
일제의 탄압

일제는 평화적인 만세 시위 운동에 대한 기본 방침으로 군중을 대량 사살함으로써 사태를 진 압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위와 탄압은 전국 각 지에서 발생하였다.

3 -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대규모 검거였으며 주동 인물에 대해서는 극악한 고문을 가 한 후 식민지 통치법에 따라 처형하였다. 일제의 고문은 잔악무도하였, 사나운 개들을 달려들 게 하여 온 몸을 물게 하였으며 여자들에 대한 고문은 더욱 잔악했다. 알몸이 되게 하여 석탄 난로에 쇠꼬챙이를 달구어 젖꼭지를 찌르는가 하면 손톱을 뽑아내기도 하였다.

3 · 1독립운동에 대하여 일제의 잔인한 보복의 예를 한 가지 든다면. ‘제암리 학살 사건’을 들 수 있다. 1919년 4월15일 오후 2시경 일본군 보 병 제 78연대 소속 아리타 우 타오케 중위가 이끄 는 일본군 30여명이 제암리 부락을 포위하고 안 정옥 등 22명을 체포하여 제암리 교회에 감금하 고문과 창문에 못을 박아 나오지 못하게 하고 는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교회에 방화하였다. 김정헌  ·  노경태 두 사람은 벽을 파괴하고 뛰어 나와 김정헌은 밖에 있던 부인과 함께 고주리 쪽으로 피신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총격으로 김정헌은 현장에서 죽고 부인은 관통상을 입어 이튿날 새벽 자택에서 사망했다. 일본군은 또 부 락에 불을 지르고는 고주리 부락을 포위 습격하 여 김광열 등 6명을 체포하여 군도로 난도질, 모 두 살해하여 노적까리에 불을 질러 모두 화장해 버렸다. 이 사건으로 제암리에서 23명, 고주리에 서 6명 모두 29명이 참살당하였으며 이것은 그 방법에 있어서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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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신문에 보도된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 장면. 3.1운동 이후 학살은 더욱 심해졌다


정리를 마치며……

우리는 이 3 · 1 독립운동을 통하여 왜 일제의 침략을 받아야만 했던가. 또한 오랜 인욕에 헐벗 기며 얼마나 애타게 조국광복을 갈망했던가를 바로 아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애국선열들은 그들의 부모. 형제. 자식까지 외면하며 오로지 조국만을 위하여 산화하였다. 그러나 해방후 우 리들은 어떠하였는가? 지하에 계신 선열들의 그 뜨거운 피가 채 식기도 전에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은 개인의 충족만을 위한 사회의 혼란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지난 날의 것을 교훈 삼아 다시 는 같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허용하여서는 안 되 겠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 였는가를 알고 그것을 교훈삼아 올바른 내일을 위하여 전진해야할 것이다.

5천년 역사상 민족 정통적 민족정기의 발로 로써 일제 침략하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우리 민족

조국 광복을 위하여 전생애를 초개같이 바치 신 3천여 애국선열들의 숭고하고 자랑스러운 업적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민족의 대의와 정기의 소재를 밝히고 우리 후세들이 걸어나갈 앞날에 다시는 이러한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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