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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준교수의 후기밀교 | 광명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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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06-07 15:54 조회1,2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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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차제

 

구경차제의 광명차제(光明次第)는 광명법신을 성취하는 수행이다. <금강만딴뜨라>에서는 광명차제를 낙현각차제(樂現覺次第)라고 명명한다. 데바의 낙현각차제 주석에는 광명에 대해 광명은 일체공의 자성이다.”라고 주석하였다. 광명차제와 친숙한 것은 한국불교에도 잘 알려진 광명진언이다. 진언을 풀이하면, ‘아모가 바이로짜나라고 설한 것은 불공(不空)의 변조광명(遍照光明)이여!’라는 뜻으로 공성의 광명으로부터 비로자나법신의 성취를 촉구한다. 이어지는마하무드라대인(大印)’으로 번역되며, 정각자의상으로서 법신의 성취를 가리킨다. 광명진언은 사자와 생자 모두에게 통용되는 진언이다. 사자는 법신을 성취하고 생자는 삶이 곧 열반의 경계이며 법신의 몸이다. 후기밀교의 구경차제는 이에 대한 기술적 진화하고 말할 수 있다.

구경차제는 생기차제로부터 출발해서 금강염송차제, 심청정차제를 순서적으로 수습하는데, 이는 순서적으로 금강신, 금강어, 금강심의 수습에 배대된다. 심청정차제에서 유가자는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에 대해 공,극공, 대공으로 대치되는 공성을 수습해왔다. <지혜금강집딴뜨라>에서는 온과 계와 처 등의 궁극[邊際]는 공성이다. 이 삼공(三空)의 궁극은 광명이다.”라고 하였다. 광명차제는 심식의 분별을 제거 한 돈오의 경계이자 절대공성을 현증하는 찰나이다. 이 깨달음의 경계를 <오차제>에서 진실의 경계(實際 bh?ta-koti)’라고 이름하며, 석가모니붓다가 새벽에 성도하신 장면과 동일시한다. <오차제>에서는, “이것은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고, 그 중간도 아니다. 일체의 자성을 떠난 이 정각은 찰나의 경계라고 최승의 아사리는 설한다. 그 중간의 변제는 멸하지 않으며, 암흑이 모였지만 무여(無餘)이며, 앉은 자리에서 일체를 초월한 것으로 태양이 아직 떠오르지 않은 이 찰나를 궁극의 경계라고 설한다.”라고 하였다.

인류의 고대종교는 여러 유형이 있지만 지역분포가 가장 넓은 것은 태양신앙일 것이다. 만물을 키우고 천체를 주 재하는 태양의 권위는 점차 관념상의 절대자로 진화하지만 고등종교에 끼치는 영향은 여전히 적지 않다. 석가모니 붓다는 무명의 소멸을 설하셨다. 초기 경전에서 붓다의 깨달음을 명(vidya) 이라 설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무명의 어두움을 대치하는 것은 지혜의 광명이다. 그 지혜는 오온을 자아로 오인하는 아집과 외경의 실체를 부정하는 연기의 지혜이다. 대승불교시대의 법신광명과 정토신앙의 무량광에 보이는 광명의 의미는 석존이 설하신 연기의 지혜에서 그 시원을 둔다.

광명차제의 실제수행은 광명관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차제>에는 광명을 현 증의 방법에 돈관(頓觀, pi???graha)과 점관(漸觀, anubheda)2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오차제>에는 돈관에 대해, “머리에서 발끝, 가슴에 이르기까지 찰나에 진실의 경계를 성취한다라고 하였고, 점관에 대해서는, “호흡의 풍()이 거울에 융합하는 것과 같이, 유가자는 바른 진실제에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든다. 행주좌와와 먹거나, 웃을 때, 이 선정의 유가에 진실을 아는 자는 항상 머문다.”라고 하였다.

광명차제의 돈관은 선수행의 돈오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선사들이 방과 할로써 제자들을 가르친 것은 생각의 습관에 갇혀 있는 무명의 상속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지만 방과 할의 활용과 정 각자의 삼신을 성취하는 방편은 달라야 한다.

밀교의 가장 큰 특징은 곧 유상유가(有相瑜伽)이다. ()을 빌려 무상(無相)의 공성(空性)에 도달하는 교육방식 은 인간의 심식을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 원성실성의 삼성으로 분석하고 활용하는 탁월한 유가행의 이론에서 비롯된다. 분별을 통해 무분별에 이르고 소 연상에 의지해 무연(無緣)의 진리에 도달하는 수행은 천여 년에 이르는 인도 밀교의 지혜와 경험의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