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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준교수의 후기밀교 | 헤와즈라딴뜨라와 공성, 그리고 나란다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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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11-06 13:48 조회8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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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와즈라딴뜨라와 공성, 그리고 나란다대학

 

 

인도후기밀교는 화엄이나 천태의 불전문학, 삼론이나 법상의 신유식, 선불교에 익숙하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의 소와 별기, 원측의 <해심밀경소>를 공부하면 밀교에 접근하기가 쉬워진다. 한마디로 중국불교의 지역성에 기인한 사상적 각색으로부터 벗어나있다. 밀교는 용수보살의 사상을 계승하며, 공성과 유식의 양 수레의 궤를 잃지 않는다. 용수보살의 교학은 인도 나란다대학의 전통에도 영향을 미치고 불교를 변화시켰다. 인도후기밀교에서 보이는 아무리 심오한 비의도 용수보살의 이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도후기밀교에서 불이존에 대한 교의적 시설은 누구나 궁금해 한다. 어쩌면 후기밀교의 벽을 넘는 관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불교의 불이존은 관념적 해석이 강하다. <헤바즈라딴뜨라>에는 불이존에 대해, “요기는 방편이고 자비이며, 반야모(mudr?)는 모든 인(, hetu)으로부터 벗어나있다. 공성과 자비의 구별이 없는 것을 보리심이라고 한다.(I.10.40)”라고 하였다. 요기는 수행자로서 인격이다. 의식과 더불어 살과 뼈, 근육으로 이루어진 살아있는 현상이다. 때문에 요기는 실상의 활동적 측면을 가리키기에 방편이다.

방편은 두 가지 기로에 있다. 방편을 자아성이나 불변성, 영혼과 같은 실재로 착각하면 그는 아득한 윤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방편은 오로지 공성으로 이해함으로써 궁극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고 비로소 해탈이 가능하다. 불이존에 대해 인간의 성징을 들이대면 딴뜨라의 벽을 넘지 못한다. 인간의 자아에 대해 그 공성의 본성을 관조하고 결합하는 것이 바로 수습이다. 성징을 통한 인간의 현실을 가감 없이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현실은 마음과 틱레, 풍과 풍맥의 통로로 이루어진 육신이며 독립적으로는 온존한 풍맥의 통로를 다할 수 없다. 때문에 불이존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후기밀교의 불이존은 관념적인 공성의 수습과 방편신으로서 정신을 육체적 존재로 이끄는 지식이 숨어있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무드라는 진리로서의 실상을 가리킨다. 유정의 분별이 아닌 무분별의 자각에서 보이는 실재이다. 만다라의 사무드라는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반야모는 유정으로서 인격이 아니다. <요가라뜨나말라>에서는 반야모에 대해, “무드라는 반야모를 뜻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반야는 제법불생의 공성이다. 왜 불생이 공성인가? 모든 인()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자기로부터, 타자로부터도, 이 둘로부터도 혹은 이 둘이 아닌 것으로 부터도 벗어나있으며, 모든 사물은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불생의 특징이 공성이고 그것이 최상의 반야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이러한 정의는 나가르주나의 <중론>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