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깨달음의 지혜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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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7-31 16:52 조회7,0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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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며, 해탈을 통하여 절대평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궁극의 목적을 해탈 혹은 열반에 두고서 이것을 추구합니다.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를 한자로 음사한 것으로서, 원래는 ‘불어서 끈다’라는 뜻인데, 심신을 괴롭히는 번뇌의 불을 불어서 끈 절대평안의 안락한 마음의 경지를 말합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 여름에 소나기 한 줄기가 내려 시원하게 적셔주는 그러한 상태를 열반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혹은 대장간에서 이글이글 뜨겁게 단 쇠를 물에 넣어 식히는 것을 상상해도 좋습니다. 욕심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에 심신이 달아올라 벌겋게 되었을 때 냉철한 지혜의 얼음물로써 그것을 식혀버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욕망과 성냄이 식어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게 되고 그로 인한 괴로움도 잠잠하게 수그러듭니다. 그리고 마음은 한없이 푸근하고 편안해집니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확대되어 모두가 나와 같은 평안을 누리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곧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이러한 해탈이나 열반은 깨달음의 지혜에 의하여 완성됩니다.


  이 깨달음의 지혜라는 것은 우리가 해탈,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불변의 진리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직접?간접의 원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세상이나 자연현상에 모두 적용되는 법칙으로서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은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거나 혹은 여러 가지 원인이 결합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괴로움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은 무엇인가의 원인에 의하여 발생합니다. 그 원인을 제거하면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그 원인을 알고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지혜에 의하여 해탈을 얻고 열반의 경지에 머무를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등불을 들고 들어오면, 바로 그 순간 어둠이 사라지듯이 깨달음의 지혜를 획득하는 그 순간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지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의 지혜를 획득하는데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깨달음의 지혜를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 하며 산스크리트로는 아눗다라삼먁삼보리(Anuttara samyak sa?bodhi)라고 합니다. 밀교에서는 일체지지(一切智智)라고도 합니다. 위없는 가장 훌륭한 지혜이며, 모든 지혜를 아우르는 지혜 가운데의 으뜸가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불교의 이러한 지혜는 일반적인 학문의 지식이나 사회생활에 관한 지식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지혜입니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지식이 풍부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다고 하여도 이런 사람들의 지혜는 불교의 지혜와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지혜는 청정한 마음을 본질로 하고 있으며 집착하지 않는 마음,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회에서 평가되는 우수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지혜가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에서 우수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이름이 널리 드러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교적으로 보면 이들의 대부분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세력, 혹은 영향력을 늘리거나 명예를 추구하는 정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불교적인 지혜는 이러한 사회적 평가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학력의 고하나 재산, 명예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획득될 수 있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지혜는 청정한 마음과 분별없는 마음으로 진리를 직관하여 괴로움으로부터의 영원한 해탈을 추구하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불교의 목적은 성불에 있되, 그것은 괴로움, 즉 고(苦)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며, 열반이라는 것입니다. 열반은 고로부터 벗어난 절대평안의 안온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탈과 열반은 깨달음의 지혜에 의하여 획득됩니다. 불교의 수행은 곧 이러한 지혜를 갈고 닦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목적이 수행자의 해탈이나 열반에만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초기불교에서는 개인의 해탈이 주된 목표였으나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중생들이 다함께 해탈하는 것에 더욱 중점을 두었습니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가 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성불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러한 성불이 누구에게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염원하고 함께 노력하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누구나 수행에 의하여 최고의 지혜를 획득하고 불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대승불교의 이상입니다. 그 중에서도 대승불교의 후기에 등장한 것으로서, 진언(眞言)과 삼밀행(三密行) 등의 신비적 수행에 의하여 진리의 비밀을 곧바로 체득하려는 가르침인 밀교(密敎)에서는 바로 이 순간, 이 몸으로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부처가 되었다고 하여도 나만의 성불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비로 충만한 부처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에게 지혜의 빛을 드리워 해탈과 열반으로 이끌려고 합니다. 그것이 곧 자각각타(自覺覺他)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깨달음에 이르지만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래의 석가모니부처님의 정신입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이상을 밀교의 《대일경(大日經)》에서는 “보리심을 인(因)으로 하고 대비(大悲)를 근(根)으로 하며 방편을 구경(究竟)으로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일으키고 큰 자비심을 바탕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보면 깨달음의 지혜를 얻어 모든 고로부터 벗어나 열반을 이루고 또 그것을 중생을 위하여 회향(廻向)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요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 공부를 시작할 때는 이러한 궁극적 목표와 이상을 마음에 새기고 정진해야 하며 이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열반이다 성불이다 하니까 너무 거창한 것 같아 나와는 너무 까마득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부닥치게 되는 여러 가지 고의 원인을 잘 관찰하고 마음을 잘 다스려 그것을 극복해 나간다면 그만큼 해탈하는 것이고 그만큼 성불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지나친 욕심과 그것을 쟁취하지 못하는 데 대한 분노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과 분노는 고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제어할 지혜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 공부를 할 때에는 항상 고로부터의 해탈이라는 대명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혜로써 해탈의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해 나아간다는 것만 확실히 알아두신다면 불교의 모든 교리가 이러한 것을 위하여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만사천의 법문도 오직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대명제를 전제로 그 방법을 설해 놓은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만약 괴로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불교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은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며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이러한 명제에 부합되지 않는 이론은 무시해도 좋습니다.


  불교 공부가 어렵다고 하지만 이러한 도식을 머릿속에 그려 놓고 놓치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공론에 마음을 빼앗겨 방황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목표를 분명히 알고 가는 자에게는 길은 멀어도 언젠가는 거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불교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로움, 즉 ‘고(苦)로부터의 해탈’이라는 궁극의 목표와 이상을 마음에 잘 새기고 지혜를 닦아 나아가면 이 생에서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까지는 못 가더라도 인생을 한결 여유 있고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