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육바라밀로 보살도를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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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1-04 09:39 조회6,2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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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보살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가장 많이 들어 본 보살 이름이 아마 관세음보살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 신앙이 매우 성하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 이외에도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대세지보살 등등 수많은 보살이 있습니다. 보살(菩薩)이라는 말은 보리살타(菩提薩?)에서 온 말로 그 어원은 인도 고대의 언어인 산스크리트 보디삿트바(bodhisattva)입니다. 처음에는 보살이라는 말이 단순히 “수행자로서의 길을 가는 사람” 이란 뜻으로 통했습니다. 그래서 총지종에서는 수행하는 모든 여자 신도분들을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불을 위하여 수행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하던 것이 대승불교로 오면서 의미가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라는 의미를 새로운 차원의 불교인의 이상상(理想像)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중생들의 행복을 위하여 보살의 상태로 영원히 머무르면서 우리에게 친근히 다가오는 분으로 묘사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보살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보살을 대승불교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대승불교에서의 보살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목표로 수행정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보살은 자기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리행(自利行)과 살아있는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을 아울러 추구하면서도 자신보다는 남을 위하는 일에 더욱 역점을 두어 자기를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중생구제를 위하여 온 몸을 바친다는 염원을 세우고 있습니다. 남의 괴로움이 곧 나의 괴로움이며 남을 위하는 것이 곧 자기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살의 마음이며 수행자세인 것입니다. 이것을 보살도라고 합니다. 보살로서 중생을 제도하자면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 뿐 아니라 지혜가 있어야합니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이것은 곧 지혜와 자비를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지혜와 자비를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것은 육바라밀을 닦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도의 실천방법으로서 육바라밀을 들고 있습니다.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ramit?) 의 음역으로서 ‘최고의 상태’ 혹은 ‘완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것에 의지하면 괴로움이 많은 미혹의 이 언덕에서 모든 괴로움을 벗어버리는 깨달음의 저 언덕에 틀림없이 도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간다는 의미로 파라미타를 한문으로는 ‘도피안(度彼岸)’이라고 의역하기도 합니다. 이 언덕이니 저 언덕이니 하는 것은 물론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라밀이라는 말은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의미도 되고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수단도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라밀에 6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육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바라밀, 정계(淨戒)바라밀, 안인(安忍)바라밀, 정진(精進)바라밀, 정려(靜慮)바라밀, 그리고 지혜(智慧)바라밀을 말합니다. 이러한 6 가지 바라밀을 육행(六行)이라고도 합니다. 이 육바라밀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일상생활에서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는 실천항목입니다.

그러면 생활 가운데에서 육바라밀은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요?
먼저 보시바라밀을 생각해 봅시다. 보시라는 것은 간탐하고 인색한 마음을 버리고 남에게 베풀라는 뜻입니다. 간탐이라는 것은 뭐든지 자기가 가진 것은 아까워서 벌벌 떠는 것입니다. 남 주는 것도 아깝지만 남의 것도 가지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 간탐입니다.


보시행을 육바라밀의 가장 첫머리에 놓은 것은 욕심을 버리고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불자로서 불도를 닦는 가장첫걸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베푼다고 할 때는 물질적인 것만을 먼저 생각하기 쉬우나 베푸는 것은 반드시 돈이나 재물로써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마음, 양보하는 마음, 위로의 말 한마디도 훌륭한 보시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괴로울 때 위로해 주는 그 마음이 바로 보시입니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주위 사람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것, 그런 것들이 보시입니다. 공손한 말씨, 싹싹하고 친절한 태도도 보시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은 물질이든 마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한량없이 베푸는 넉넉한 마음, 이것이 바로 보시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간과하기 쉬우면서도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보시바라밀입니다.

다음은 정계바라밀입니다. 정계는 지계(持戒)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율을 지킴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도의와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절도 있고 규칙적인 생활, 스스로를 제어하고 절약하며 언행을 삼가는 것 등이 정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는 것 등이 정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주, 가무나 오락에 빠져 생활의 리듬을 깨뜨리고 상스러운 말을 하며 거짓말을 하는 것 등은 정계와는 반대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의 방종한 생활 태도로서는 절대로 어떤 일을 성취하지 못 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수많은 스승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배경에는 보통사람 이상의 자기절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를 살펴서 신중하고 기품 있는 행위를 하며 자신을 잘 절제하여 생활의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정계바라밀을 실천하는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안인바라밀은 인욕행(忍辱行)이라고도 하는데 한마디로 참는 마음입니다. 화가 나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하더라도 꾹 참고 도리어 스스로에게 잘못이 없나를 반성해 보는 것이 안인행입니다. 또한 남의 칭찬에도 자만하지 않고 더욱더 겸손할 줄 아는 것도 안인행입니다. 안인행은 항상 상대가 있기 때문에 실천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보살도를 실천하는 우리들은 그 어떠한 외부적 영향에도 동요되지 말고 조용히 참아 넘기도록 해야겠습니다. 칭찬이나 비난에도 꿈쩍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진정한 용기이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 안인바라밀 하나만 실천할 수 있다고 해도 성불의 문턱에 다가 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네 번 째로 정진 바라밀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방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방일이라는 것은 마음을 놓아버리고 게으른 것을 말합니다. 옳은 법을 들었으면 부지런히 정진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성취하고자 할 때 노력 정진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무엇을 하든지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것을 성취하려면 정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히 배움에 있어서는 정진이라는 것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아무 쓸모도 없는 썩은 나무토막과 같다고 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무엇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정진바라밀은 무슨 일에나 꾸준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꾸준히 하는 것에도 방법이 있습니다.


《잡아함경》에 보면 천신이 부처님께 어떻게 해서 저 언덕에 이르셨냐고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서두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으면서 저 언덕을 건넜다고 대답하십니다. 즉, 물을 건널 때 너무 허둥대면 물살에 휩쓸려 가버리고 그렇다고 멈추어 있으면 물에 가라앉아버리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정진을 함에 있어서 너무 안달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마음을 방일하게 가져서도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소걸음처럼 뚜벅뚜벅 걸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정진바라밀입니다.



다음은 정려바라밀 혹은 선정(禪定)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을 뜻합니다.신을 믿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 무지(無知)를 타파함으로서 지혜를 얻고 진리를 체득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정려행은 불교의 중요한 행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총지종과 같은 밀교에서는 삼밀수행(三密修行)으로서 정려를 대신하므로 그 어떤 방법보다도 더 빨리 진리에 도달하고 체득할 수 있다는 데에 특색이 있습니다. 삼밀수행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우리의 마음과 몸과 언어를 컨트롤하는 훈련입니다. 참선을 하거나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거나 절을 하거나 진언을 외우는 염송법 등을 통하여 이러한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 정려바라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릇을 닦으면서 다른 생각을 한다든가 운전을 하면서 다른 데 마음이 팔려 있다는 것은 정려바라밀의 훈련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의 정려바라밀은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에 마음을 집중하여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혜바라밀이 있습니다. 지혜바라밀은 반야(般若)바라밀이라고도 하는데 이 지혜바라밀은 보시에서 정려에 이르는 다섯 가지 바라밀의 주도자이며 그것들의 성립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으므로 바른 판단이 서고 거기에 근거하여 아낌없는 베품, 엄격한 자기통제, 끝없는 참을성, 굽힐 줄 모르는 정진, 태산 같은 고요함이 가능한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믿음은 맹신일 뿐이고 지혜가 없는 보시는 도리어 악을 조장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실생활에서도 이 지혜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덕목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꿰뚫어보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흔들림 없이 슬기롭게 헤쳐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러 가지 학습을 통하여 배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항상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무한한 보살심을 바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며 그러한 가르침을 생활화함에 따라 더욱 쉽게 얻어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이치에 맞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무조건 내 말만 믿어라.”고 하는 식의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늘 합리적이고 치우치지 않는 생각으로 사물을 보려고 할 때 지혜가 싹이 틉니다. 어느 곳 어느 곳에서도 항상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바라밀을 염두에 두고 참된 지혜인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상의 육바라밀은 보살도를 행함에 있어 실천항목으로서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절대로 이상만을 추구하는 공허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우리 눈앞에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지혜 있는 자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지혜의 눈을 가지고 살펴보면 육바라밀의 실행이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도 그 실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실천 없이 떠드는 것은 남의 목장의 소를 세는 것과 같다고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육바라밀을 바탕에 두고서 보살도를 실천하려고 할 때 우리의 인격도 성장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행복이 온 누리로 확대되어 불국정토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보람이고 참된 인간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