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행복은 참 나를 찾는 것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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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2-04 13:31 조회5,7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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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는 이 몸뚱어리를 짊어지고 지금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 아늑하게 젖을 빨던 때의 기억은 거의 없어졌지만 자라면서 여러 가지 기억을 담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었던 기억, 좋은 옷을 입고 자랑스러워 하던 기억,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해서 불쾌했던 기억,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가슴 두근거렸던 기억 등등 좋고 나쁜 기억이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이런 기억 때문에 어떤 것들은 반복해서 경험해 보고 싶어하고 어떤 것들은 두 번 다시 꿈에서라도 마주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 느껴지는 직접적인 즐거움이나 불쾌감 이외에도 자라면서 사회생활을 통하여 여러 가지 경험과 기억들을 가지게 됩니다. 몸으로 느끼는 즐거움과 불쾌함 이외에도 정신적인 즐거움과 고통이 늘 함께 합니다. 즐거운 것만 추구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괴로운 거지요. 몸과 마음을 통하여 반복되는 즐거움과 고통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도대체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이런 질문도 어느 정도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극심한 기아나 생명을 다투는 전쟁터에서는 이런 질문을 해 볼 겨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순간에는 오직 목숨을 보전하는 것만이 최대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먹히는 야생동물의 무리들도 자신의 존재 의의에 대한 생각을 하는지 어떤지는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겠지만, 동물의 생태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아마 짐승들은 그런 생각을 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초를 다투며 쫓고 쫓기는, 그야말로 본능적인 생존만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은 인생을 더 충실한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삶의 여유가 있을 때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져보면서 그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잘살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면서 누구든 자신의 삶에 대해 약간의 자각만 있다면 한번쯤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인간인 이상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나는 왜 사는가?’, ‘도대체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을 하면서, 전제가 되는 것은 이 ‘나’라는 인간입니다. 돌도 나무도 짐승도 아닌 인간이라고 하는 ‘나’, 이것에 대한 정의가 먼저 있어야 내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 지, 삶의 의의와 목적이 분명해 질 것입니다.


예로부터 인간의 정의에 대해서는 많은 사상가나 종교가, 철학자 등이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썼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누고, 다시 있는 것을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으로 나눈 다음, 살아 있는 것을 다시 동물과 식물로 나누었습니다. 그런 다음 동물 중에서 이성을 가지고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를 구별하여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에게만 이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이래, 서양의 철학자나 사상가들은 대체로 이 이성이라는 것을 굉장히 신봉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특성이 바로 그 이성적 사고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파스칼이라는 철학자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그 생각하는 힘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인간의 본질을 이성이나 사고의 힘에 있다고 강조했어도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다 드러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이성이나 사고의 힘을 인간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동물보다도 더 잔인하고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이라는 것만 가지고 인간을 규정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과거의 역사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모한 짓을 저질렀는지를 살펴보면 아실 것입니다. 수많은 학살과 파괴, 끊임없는 전쟁 등을 보면 이른바 이성이라는 것이 인간을 통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서구의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그렇게 우러러 보는 인간의 이성이나 사고라는 것도 실은 자신만의 잣대이며, 무명(無明)이고 망상(妄想)인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이 있듯이, 이성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각자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을 이성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도 불교를 공부하시게 되면 차츰차츰 깨달아 가겠지만,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번뇌 망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성이나 사고의 힘만으로는 인간의 특성을 규정할 수 없게 되자 과학자들은 인간이라는 것을 밝혀보기 위해 물리적인 시도도 병행하였습니다. 즉, 인간 신체의 구석구석을 해부해서 성분을 분석해 보고 뇌를 절개해서 온갖 실험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인간의 본질이 규명되겠습니까? 그저 정신과 육체의 결합이 인간이라는 정도 밖에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와 함께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신을 닮았다느니 신의 피조물이라느니 하면서 인간의 본질을 신비적인 것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인간들의 변칙적인 행태에 대해서는 올바른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어지고 신의 피조물이라는 인간이 신을 닮기는커녕 때로는 짐승보다도 더 고약하고 잔인한 짓을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것에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이들이 반드시 옳은 답을 찾아내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인간’, 즉,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사상가나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보는 문제입니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태어나 죽으면 또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태어났을 때의 몸뚱이가 진짜 나인지 성인이 된 지금의 이 몸이 진짜 나인지 우리는 그것도 모릅니다. 지금의 내가 진짜 나라면 내 몸에 대해서는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늙고 싶지 않을 때는 늙지 말아야할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시각각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늙어버렸을 때의 나와 어릴 적의 나는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그것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어버렸을 때는 어느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는지에 대해서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들로 고민하고 나름대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도 하며 그 해답을 모색해 보지만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설사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이 확실한 답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식도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나’라는 것도 제대로 규명을 못하는데 어떻게 삶의 의의나 목표가 제대로 정해지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는 이 인간의 정체도 잘 모르겠고 그러다 보니 인생의 의의도 뚜렷이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목표도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내 욕심이 내키는 대로 추구하며 살다가 병들고 죽을 때가 되면 고통스러워하며 한 생을 마감합니다. 이 지구상에 숱한 찌꺼기만 내 뱉어 놓고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조금이라도 삶에 대한 의의를 발견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길인가를 모색하려는 사람들은 이래저래 고민이 많습니다. 그저 욕망이 이끄는 대로 되고말고 사는 사람들은 인간이 무엇이고 왜 살아야 하는지 하는 그런 것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주위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치고 제대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디까? 남들 보기에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자신에 대한 성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은 공허합니다. 어느 날 병마와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들 때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허둥대다가 괴로워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죽는 거야 누구나 다 겪는 것이고 죽음은 다 같은 것 아닌가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는 참된 나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종교이며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가를 가르쳐 주는 종교입니다. 자신과 인생에 대한 성찰이 없는 사람이 볼 때는 다른 사람의 삶과 죽음이 다 똑 같다고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알고 사는 사람의 삶이 아무 것도 모르고 백년을 사는 것 보다 더 값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살고 잘 죽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는 잘 살고 잘 죽는 방법을 일러주는 종교입니다.


-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