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불교의 믿음과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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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3-06 14:47 조회6,39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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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 무엇인가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대상은 가족이나 친족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친한 친구나 스승이 되기도 합니다. 원시 시대에는 돌이나 나무, 해와 달도 믿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가끔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신을 상정해 놓고 믿기도 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종교의 모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려울 때에 무엇인가 믿음의 대상을 가지고 의지하면 한결 수월하게 난관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O.헨리의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는 인간의 믿음에 대한 그러한 심리를 잘 표현한 글입니다. 사소한 나뭇잎 하나도 믿는 마음이 보태지면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신심이라는 것은 때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무엇인가 굳게 믿는 마음은 우리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힘을 주기도 합니다.


그릇된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자기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을 철석같이 믿으면 어느 정도의 효과를 보기는 봅니다. 병도 낫고 뭔가 일이 잘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믿음은 일시적인 효과를 줄지는 몰라도 결국은 그 사람을 망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정당한 노력은 하지 않고 신의 힘이나 기적에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병이 들었을 때 좋은 처방을 하여 병을 근본적으로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아편을 맞으면서 통증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바른 지혜에 의지하지 않는 잘못된 믿음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미신은 결국 맹신으로 굳어지게 되고 마침내는 정신을 황폐화시켜 지혜구멍을 막아버리기 때문에 건전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도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미신과 맹신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아직도 많은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런 예가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마 인간의 정신적 자유를 속박하고 민중을 종교의 굴레에 묶어 착취하던 유럽중세의 이른바 ‘암흑시대’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마녀사냥 같은 것은 그야말로 미신이고 맹신이었습니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멀쩡한 사람을 마녀로 몰아 별별 고문을 다해서 죽이고 화형에, 참수형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미신과 맹신이 낳은 인간의 무지가 얼마나 끔찍했던 지를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에서는 미신과 맹신으로 인한 종교 간의 갈등과 민족 간의 불화로 인해 수많은 비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침략과 테러로 인한 전 세계적인 불안도 미신과 맹신의 여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그릇된 신념을 무조건 신봉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합니다. 원인이야 어쨌든 그들의 행태를 보면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방식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광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보면 하두 어처구니가 없어 그야말로 광신적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릇된 믿음과 종교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이 발목을 잡고 많은 비극을 낳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선택했던 종교가 그릇된 믿음을 강요하고 그것 때문에 도리어 불행해진다면 그러한 믿음이나 종교는 없는 것이 도리어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교의 믿음은 미신도 아니고 맹신도 아닙니다. 불교의 교리는 과학적으로도 입증될 수 있는 진리이고, 누구나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어 보면 스스로 알 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뛰어넘는 기적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제공하는 신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실현하기 위한 지혜를 말할 뿐입니다. 그것은 사후의 세계에 대한 것도 아니고 신들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아 있는 중생으로서의 나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대상으로 사유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믿음을 말하되 무조건 믿는 것을 배격합니다. 항상 지혜로써 살펴보고 진리에 합당한가를 따져 본 다음 확신이 서면 그때서야 믿습니다. 관습적으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다거나, 책에 쓰여 있기 때문에 믿는다거나, 어떤 유명한 사람이 말했다고 해서 무조건 믿는 것은 불교에서는 허용될 수 없습니다. 항상 진리에 비추어 보고 이치에 합당한가를 따져본 다음에 믿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믿음은 미신이나 맹신이 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는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믿음, 혹은 신(信)이라는 말을 쓰며, 신심(信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다 같은 믿음이라도 무엇을 어떻게 믿는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른 진리를 바르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그들의 불합리한 교리를 얼버무리기 위해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맹신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합리한 것이 믿어집니까? 믿으면 믿을수록 의심은 더욱 일어나고 자신의 속마음은 더욱 꼬여지게 되어있습니다. 자신이 여태까지 믿은 것이 억울해서 그저 그런척하고 있을 뿐이지 진정으로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맹신의 태도는 철저히 배척됩니다. 불교에서는 많은 경전을 인도 고대의 아어(雅語)인 산스크르트어로 기록했는데 이것을 범어(梵語)라고도 합니다. 이 산스크리트어의 믿음에 해당하는 말의 원어는 쉬라다(?raddh?), 혹은 쁘라사다(pras?da)입니다. 이것은 ‘가르침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여 받아들이며 또 그 결과 마음이 청정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힌두교 등에서의 믿음에 해당하는 말은 박티(bhakti)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몸과 마음을 바쳐 열정적으로 믿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신애(信愛)라고 의역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 같이 믿음이라는 말을 쓰더라도 불교의 믿음은 이해하고 납득하여 받아들인다, 또, 그 결과로서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고 하는 상당히 이지적인 면을 보이는 믿음인데 반하여 힌두교의 믿음을 뜻하는 ‘박티’라는 말은 이지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면이 강조된 믿음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말 한마디에도 불교의 믿음은 진리에 바탕을 둔 이지적인 면이 강한 믿음입니다. 단순히 자기의 감정이 내키는 대로 무조건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내용을 따져 보고 이해한 다음에 믿겠다는 것이 불교의 믿음입니다.


불교에서의 이러한 믿음의 대상이 곧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라는 것입니다. 삼보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또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집단인 승가를 가장 귀중한 세 가지의 보배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삼보에 대한 믿음과 여기에 청정한 계행에 대한 믿음을 더하여 사증정(四證淨)이라고 합니다. 즉, 네 가지의 깨끗한 믿음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사불괴정(四不壞淨)이라고도 하는데, 네 가지의 무너지지 않는 믿음의 대상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삼보나 실천 방도로서의 계행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지혜의 개발로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 우리는 해탈(解脫)했다, 열반(涅槃)에 들었다, 성불(成佛)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의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것은 고통, 혹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깨달음의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모르는 중생의 근본무명(根本無明)에서 모든 괴로움이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에 무명을 깨뜨리는 지혜의 획득을 불교의 궁극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 있어서의 지혜는 입문에서 해탈의 그 순간까지 일관하여 강조되고 있습니다. 지혜가 결여된 믿음이 곧 미신이고 맹신입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이라는 불교의 논서에는 ‘불법의 큰 바다를 믿음으로 들어가서 지혜로써 건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불교에서도 믿음을 중시하지만, 그 믿음은 미신이나 맹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지혜를 얻기 위한 진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불교에서의 지혜는 삼보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청정한 계행과 마음을 고요히 하여 진리를 관조하는 선정을 통하여 획득됩니다. 다른 종교에서처럼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성찰과 그릇된 행위에 대한 제어를 통하여 진리를 확인하고 검증하면서 지혜를 체득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무조건 믿는 종교가 아니라 지혜를 밝혀 괴로움의 근원을 제거하고자 하는 종교입니다. 지혜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다른 어느 종교에서보다도 불교는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