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뗏목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10 10:12 조회5,193회

본문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집착의 대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곧 공의 실천이며 중도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진리조차도 열반에 이른 다음에는 버려야 할 것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아함경》 가운데의 〈벌유경(筏喩經)〉이라는 경에서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대들이 만약 뗏목의 비유를 이해한다면, 그때는 선법도 곧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선법이 아닌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뗏목의 비유라는 것은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넌 후에는 뗏목을 내려놓고 가야지 둘러메고 가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뗏목 삼아 열반의 저 언덕에 다다른 뒤에는 그 진리조차도 집착하지 말고 버려야 할 것인데 진리 아닌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라든가 선악을 부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과 맞지 않는 것은 배척하여 싫어하고 자기의 신념만을 고집하고 집착하는 독선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고 있는 진리, 혹은 신념과 맞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고집하여 그것을 배척하고 공격한다면 또 다른 악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계행을 잘 지킨다는 사람이 자기만 잘 지키면 될 것인데 다른 사람이 자기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흔히 율사라는 사람들 중에는 찬바람이 쌩쌩 나서 가까이 가기도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계행이라는 기준에 얽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계행을 지키는 것이 해탈에 이르기 위한 방편인 것을 잊어버리고 계행이라는 그것 자체에 얽매여 자신도 괴롭힐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괴롭히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아무리 좋은 법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중도를 놓쳐버린다는 것을 말해주는 예입니다.


   그러나 선이나 진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을 악을 용인하는 것으로 잘못 알거나, 선악을 따지지 않는 것을 무집착으로 잘못 이해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불교사상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공의 실천으로서 중도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