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정사유(正思惟)---바른 생각이란 무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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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23 11:47 조회7,10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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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유는 정지(正志) 혹은 정사(正思)라고도 합니다. 정사유는 한 마디로 올바른 생각이며 올바른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 가운데의 정견이 전체에 대한 종합적이고 기본적인 바른 견해라고 한다면, 정사유는 하나 하나의 사안에 대해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정견에 준한 바른 사유, 바른 의사(意思)로서 이것은 우리의 언어와 행동을 일으키는 바른 의지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잡아함경》에서는 세속의 바른 사유와 세속을 떠난 지혜로운 자의 바른 사유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바른 사유인가? 바른 사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바른 사유로 번뇌와 집착이 있으나 선취로 향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세속을 벗어난 지혜로운 자의 바른 사유로 번뇌와 집착이 없고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여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게 한다.


정견에서 본 것처럼 정사유도 세속의 것과 세속을 떠난 지혜로운 자의 것으로 나누어집니다. 세속의 바른 사유는 번뇌와 집착을 다 버리지는 못했으나 선취(善趣)에 태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속을 벗어난 바른 사유는 지혜로운 자의 것으로서 번뇌와 집착을 벗어나고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먼저 세속의 바른 사유란 어떤 것인지를 경전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번뇌와 집착이 있으나 선취로 향하게 하는 세속의 바른 사유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생사를 벗어나려는 생각, 성냄이 없는 생각,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을 일러 세속의 바른 사유라 한다.


세속의 바른 사유로서 생사를 벗어나려는 생각을 출리각(出離覺)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냄이 없는 생각은 무에각(無?覺)이라고 합니다. 또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은 불해각(不害覺)이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 생각을 선취(善趣)에 태어나게 하는 좋은 생각이라고 하여 삼선각(三善覺)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팔정도를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즉, 팔정도는 깨달음에 가까이 간 지혜 있는 자의 실천 덕목으로서 생각할 수도 있고, 세속인으로서의 바른 실천 덕목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속인으로서 번뇌와 집착을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못했지만 팔정도를 실천함에 의하여 우리의 지혜도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삼선각을 살펴봅시다. 세속인으로서의 바른 사유라는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바르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견에 의하여 전체의 실상을 바르게 보는 견해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면, 정사유에 의해서는 개개의 사실, 개개의 행동에 대해 바르게 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삼선각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출리각은 생사를 벗어나려는 생각을 말한다고 했는데, 생사를 벗어난다는 것은 곧 생사를 초월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리적으로 보면 우리는 분명히 태어나서 죽습니다. 그러나 존재의 실상을 알고 보면 우리는 그저 변화의 한 과정 가운데에 있을 뿐입니다. 생과 사라는 것을 구분지어 보는 우리의 인식이 생사라는 것을 만들뿐입니다.
우리는 세속 생활을 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항상 생사를 초월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오히려 사는 것이 즐겁고 보람되게 생애를 보낼 수 있습니다. 생이라는 것에 집착하면 오히려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생에 집착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자기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 줄로 착각하고 죽을 때까지 돈을 벌기만 할 뿐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고 친척이고 다 멀리 하게 되고 돈벌레처럼 돈만 지키다가 돈의 노예가 되어 추한 몸뚱이를 껴안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혹은 자기의 삶이라는 데에 너무 집착하다가 보니까 자기 스스로를 들볶아 마음의 평화를 잠시도 맛보지 못하고 과로로 쓰러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꼭 그렇게 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이라는 데에 너무 집착함으로써 인생의 참된 의의를 잊어버리고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등산을 다니다가 보면 어떤 사람은 산에 올라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주위 경관을 하나도 즐기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산을 올라가는 것에만 목적을 둔 사람은 굳이 산에 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다른 운동을 해도 산에 올라가는 효과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착과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저 고개만 넘으면 뭔가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겠지 하면서 한없이 앞으로만 달려갑니다. 멈추어 서서 주위풍경도 둘러보고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 가도 한번쯤 살펴보고 가면 더 좋을 텐데 앞으로만 냅다 달려갑니다. 그래봐야 마지막에는 결국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빈손으로 가게 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속 생활을 하면서도 바른 사유를 통하여 이러한 것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생사를 초월하려는 출리각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생사를 초월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인생살이에서 그렇게 안달복달하면서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친구도 사귀고 좋은 경치도 보고 푸른 하늘도 보고 느긋하게 즐기면서 들판에 소풍 나온 것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에 이미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언제 어떤 형태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자신을 스스로 괴롭힙니다. 우리가 생사를 벗어나겠다는 것에 대해 바른 사유를 한다면 삶에 대해 그처럼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항상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고, 또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가 미래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출리각이라는 것은 곧 생사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생사를 초월할 때에 오히려 삶다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생사의 틀을 크게 보고 탐욕을 떠나며 관능의 향락을 멀리하는 것이 세속의 바른 사유인 출리각입니다.


삼선각에서 두 번째로 성냄이 없는 무에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사유를 한다는 것은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바른 생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냄이 없는 생각을 세속의 바른 사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서 자기의 마음을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바른 사유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마음이 평정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사물이 바르게 보이는 것이지 내 마음이 성냄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바른 생각이 자리를 잡을 공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홧김에 어쩌고.....’ 하는 말을 자주 쓰는데, 화가 난 상태에서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바른 사유를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나는 것 때문에 큰일을 저지릅니까? 화가 나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서 다른 사람의 원한을 사기도 하고 때로는 화가 나서 다른 사람의 비밀을 말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빌미가 되어서 더 끔찍한 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은 자기의 욕심을 채울 수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욕심나는 것을 가지지 못하니까 그것이 화가 납니다. 그리고 자기의 욕심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화를 냅니다. 화의 근원도 따지고 보면 결국은 자기의 탐욕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생사를 초월하겠다는 초연한 마음을 가지면 탐욕을 부릴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허물어지는 세상 이치 가운데에서 자기 것이라고 고집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세상 이치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탐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화를 냄으로써 모든 일을 바르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 욕심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욕심을 가지기 때문에 나의 욕심과 만나면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불한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변해서 극락정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나의 내면의 세계가 변함으로써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이지 부처가 되었다고 해서 세상에 착한 사람만 남고 나쁜 사람은 다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처는 마음에 욕심이 없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떠나있으므로 화낼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유하면 무엇이든지 바르게 보입니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뒷전에서 구경하는 사람에게 판이 더 잘 보이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정한 마음으로 사유하면 더 현명하고 바른 사유가 됩니다. 어떤 대상에든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바른 사유를 하는 데에 있어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에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불해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자비에 바탕을 둔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른 사유를 하는 데에 있어서는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꼭 때리고 욕하고 살생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떠한 형태로든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은 해치는 것과 같습니다. 남을 해치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른 사유라는 것은 해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려고 해서도 바른 생각을 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자기의 이익만 앞서서는 올바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남을 해치지 않고 무엇이든지 도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면 잘못될 것이 없습니다.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사유해야 합니다. 그것은 물론 한없는 자비심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면을 넘어서 남의 행복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자신의 행복은 저절로 찾아질 것입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의 행복도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높다고 했습니다.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고도 행복하지 못했던 록펠러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살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자신도 행복해졌다는 이야기가 이런 것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사를 초월하겠다는 생각인 출리각, 화를 내지 않겠다는 생각인 무에각, 남을 해치지 않겠다는 생각인 불해각은 비록 세속의 번뇌와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더라도 우리를 선취로 이끄는 지혜로운 생각이라는 것이 바로 세속적인 정사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견과 마찬가지로 정사유는 팔정도 가운데에서 우리의 지혜의 면을 말한 것입니다.


-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