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괴로움의 싹은 지혜의 칼로써 잘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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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4-21 09:54 조회7,50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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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비유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넓은 들판에서 놀다가 사나운 코끼리에게 쫓겨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곧 밟혀 죽을 지경에 처해 피할 곳을 찾으니 어떤 우물가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나무뿌리가 우물 속으로 뻗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곧 나무뿌리를 잡고 내려가서 우물 속에 숨었습니다. 그는 그 나무뿌리를 붙들고 매달려 있었는데 팔이 아파 금방이라도 밑으로 떨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독사 네 마리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디에서 흰 쥐 한 마리와 검은 쥐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무뿌리를 갉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넝쿨이 끊어져 밑으로 떨어지면 독사에게 물려 죽을 판인데 무심코 위를 보니 벌집이 달려 있고 거기에서 꿀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꿀물이 이 사람의 입으로 흘러들어 가자 이 사람은 자기가 처한 절대 절명의 위험도 잊은 채 그 꿀맛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곧 우리 인간들입니다. 넓은 들판이라는 것은 무명의 긴 밤이 넓고 멀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나무뿌리는 우리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으로 되풀이되는 시간의 흐름을 말합니다. 코끼리나 독사는 우리의 육신과 번뇌를 말하는 것이고 꿀물 방울은 눈앞의 아주 짧은 쾌락, 즉 우리의 오욕락(五慾樂)을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닥쳐오고 있는데도 그저 눈앞의 잠깐의 쾌락 때문에 그러한 것을 잊어버립니다. 결혼식에 참석해 보면 신혼부부가 그 날은 그저 한없이 행복해 보입니다. 불행의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그런 행복감은 신혼여행 갔다 와서 몇 달 동안 지속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 이어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압박이 닥쳐오고 출산의 고통이 따릅니다. 부모 그늘 밑에서 고이 자라던 것과는 달리 자기들 스스로 가정이란 것을 꾸려가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고 다툼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애가 생기면 또 애 키우느라 세월이 어떻게 지나가는 지도 잘 모릅니다. 방긋 웃는 애기의 귀여운 모습에 행복해 하는 것도 사실은 잠깐입니다. 그 애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 아이들 다 키워서 시집 장가 보낼 때까지 애간장 태우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시집 장가 보내놓아도 이들에 대한 근심 걱정은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보면 본인들도 어느덧 나이 먹고 병들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것이 대부분의 인생입니다. 눈앞의 꿀 몇 방울을 받아먹기 위하여 우리는 많은 힘든 것들을 참으며 한 세월을 보냅니다. ‘순간의 행복, 영원의 고통’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어리석은 중생들은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건가 보다 하고 살다가 막상 자기 앞에 큰 불행이나 죽음이 닥쳐야 울고 불며 지난 한 세월 탓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우리의 괴로움의 근원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하여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몇 방울의 꿀맛에 도취되어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험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괴로움으로 점철되어 있다니까 몰지각한 사람들은 불교를 현실 도피적이며 염세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결코 괴로움이라는 것이 무서워 속세를 버린다든가 다음 세상을 기약하며 이 세상의 삶을 포기하려는 현실 도피적이고 염세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리석음에 의하여 초래된 괴로움의 세계,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라고 가르칩니다.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진정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불교가 현실 도피적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밀려오는 고통을 외면하고 망각하려 하면서 밝은 쪽에만 눈을 돌리려는 사람들이 현실 도피적인지는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불교에서 인간의 삶을 고로 보는 이유는 분명한 현실인식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그러한 정확한 현실인식을 근거로 거기에 대한 정확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야말로 실제로는 가장 현실적인 종교이며 인생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종교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의 이러한 면은 다른 종교가 괴로움[고(苦)]이라는 것을 벗어나는 방법으로서 절대적인 신의 권능에 의지한다던가 아니면 이 세상을 포기하고 다음 세상을 기약하기 위하여 현실의 삶을 희생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실상을 바로 보고 그것의 원인을 밝혀 근본부터 개선하려는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절대적이라고 믿는 신의 권능에 의지하여 고를 면하게 해달라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고에 대한 실상을 파악하여 그것을 스스로 해결기보다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여 그것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손쉽게 신이라든가 영능력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의지합니다. 사교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그 틈새를 파고듭니다. 그러나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그러한 것에 의지하는 것은 일시적인 마취에 불과합니다. 열렬한 기도에 의하여 신의 힘을 빌림으로써 고를 면해 보겠다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똑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과 다름없습니다. 기적이란 정당한 노력에 의하지 않고도 엄청난 결과를 획득하자는 것입니다. 사교일수록 이러한 기적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기적이라는 것은 마약과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은 손쉽게 이러한 마약에 유혹됩니다. 사교 집단에 사람들이 들끓는 것도 다 이러한 기적이라는 마약에 현혹되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는 것도 아마 이런 맥락에서 그렇게 비판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고라는 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절대자의 힘에 의지하여 잠시 동안 마취의 상태에 든다거나 고의 실상에 대해 눈을 돌리고 외면해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에 직면하여 고의 실상을 바로 보고 그것을 철저하게 분석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고가 일어나게 된 원인을 밝혀 그것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 방법은 진리에 입각한 지혜로써 고의 싹을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고의 근본 원인을 철저히 분쇄해 버립니다. 이것이 곧 깨달음의 지혜로써 해탈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레서 불교에서는 지혜의 개발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합니다. 우리가 불교에 대해 배우는 모든 것이 지혜의 개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며 불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수행방법은 지혜를 개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것인가는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지만 모든 교리와 수행방법이 지혜를 개발하기 위한 것임을 이해한다면 불교를 보는 눈도 한층 높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중앙교육원 교육원장 화령 정사 (정심사 주교)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