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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식의 3단계, 삼위(三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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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4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1-01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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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1-12 15:16 조회 2,20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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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심뽀이야기 (15회)

제8식의 3단계, 삼위(三位)

제8식에 대해서는 수행단계에 따라서 나누어 설명한다. 제8식 자체가 워낙 포괄적이고 복잡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수행의 단계에 따라서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을 유식학에서는 삼위(三位)로 설명하는데, 삼위는 세 가지의 단계이다. 


첫 번째는 아애(我愛)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며, 집장하는 작용이 실질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상태이며, 아애의 집장이 현행한다고 하여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라 한다. 제7식이 제8식을 자아로 집착하는 집장의 작용이 아직까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계는 대승보살의 제7지까지 해당된다. 그러므로 대승보살의 십지 수행과정에서 제7지까지는 아직까지 자아라는 집착이 남아있는 단계에 해당하며, 제8식 중에서 자아에 대한 집장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아뢰야식이 아직 남아있는 단계를 말한다. 


두 번째는 보살의 제8지부터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게 되고, 그 대신에 이전에 있었던 선악에 대한 과보만 남아서 지속되고 있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라 한다. 이것은 선악이라는 자기가 지은바 원인에 대한 과보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태이고 이 경우는 보살의 제8지 이상 제10지까지 지속되는 과정 속에서 선악의 과보가 남아있는 단계를 말한다. 


이런 경우는 아애로써 집장하는 상태를 벗어난 단계이다. 왜냐하면 제7식에 의해서 자아로 집장되어지는 대상이 되는 아뢰야식이 이미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제7식이 더이상 자아로 집장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지게 되었으므로 아애에 대한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무아와 연기의 이치를 깨달아서 아집(我執)을 벗고, 아공(我空)을 얻음으로써, 번뇌의 장애인 번뇌장(煩惱障)이 단절하게 되므로 해탈의 뛰어난 과보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이전에 있었던 선악업과에 대한 과보는 남아있어서 그 결과를 받아야 하는 위치이기에 선악업과위라 한다. 또한 제8식 중에 집장의 뜻이 강한 아뢰야식이 끊어졌기에 이 단계부터는 제8식을 아뢰야식이라고 부르지 않고, 과보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선악업과위라 한다. 


제8지 이상의 보살들에게는 제8식을 아뢰야식이라 하지 않고, 과보가 남아있다는 뜻에서 제8식의 과상의 이름인 이숙식(異熟識 : Vipaka)이란 명칭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제8식을 아뢰야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생의 유루심을 극복하는 것이 목표이기에 우리들의 심식 중에 아집의 유루심이 남아있는 제7지 보살의 이전단계가 중요하기에 아뢰야식이란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세 번째는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다. 상속집지위는 범부에서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제8식이 종자를 집지하여 지속하는 위치이다. 상속(相續)은 지속된다는 의미이며, 집지(執持)는 지닌다는 뜻이다. 따라서 범부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유루의 종자와 무루의 종자를 함께 지속해서 지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렇기 때문에 범부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단계에서는 제8식 속에 업력을 저장하는 유루종자를 지니게 되고, 깨달음을 얻게 되면 유루의 종자를 버리고 무루의 종자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유루와 무루의 종자를 함께 지니는 가장 포괄적인 단계가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때 제8식의 이름은 종자를 지니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집지식(執持識 : Adana)이라 한다.


제8식은 세 가지의 단계에 따라서 그 이름이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애에 대한 집장이 현행하고 있는 보살 제7지까지는 아집의 종자가 남아있기에 아뢰야식(阿賴耶識 : Alaya)이라 하고, 제8지 이상의 보살들에서는 유루의 번뇌가 끊어지고 선과 악의 과보만 남아있다는 점에서 이숙식(異熟識 : Vipaka)이라 하고, 범부는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유루와 무루의 종자를 모두 상속하여 집지한다는 점에서 집지식(執持識 : Adana)이라 한다. 이렇게 제8식은 그 작용과 단계에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들의 입장에서 시급하게 끊어야 하는 세속의 번뇌를 설명할 수 있는 아애집장의 의미가 제일 크기 때문에 제8식을 아뢰야식으로 통칭하고 있다.


우리 범부들은 수행을 거듭해 감으로 인해서 자기의 내면을 고양시켜 진리를 볼 수 있게 된다. 이 진리를 체득하는 단계를 견도(見道)라 하여 십지로 보면 초지의 최초의 마음, 즉 입심(入心)을 말하며 그 이후의 수행을 수도(修道)라 한다. 이 단계에서 수많은 번뇌를 하나하나 소멸해서 제10지의 최후의 마음, 즉 금강심에 있어서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을 소멸해서 다음 순간 불과(佛果)를 얻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은 범부에서 부처가 되기까지의 인격적 발달을 그 본질로 하지만, 여기에서 인격의 발전 향상이란 자기 존재의 근원체인 아뢰야식의 질적 향상을 의미한다. 


아뢰야식은 우리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이라고 하지만, 이 생명을 유지하는 작용을 전문적인 용어로 집수(執受)라고 한다. 집수는 개체를 생성시키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과 관계가 깊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은 집수와 기세간이며, 아뢰야식은 몸과 마음의 주체가 된다. 


이와 같은 생리적, 유기적 관계를 안위동일(安危同一)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안위동일이란 어느 한쪽이 양호한 상태면 다른 쪽도 양호하고, 어느 한 쪽이 나쁜 상태이면 다른 쪽도 나쁜 상태에 놓인다는 의미이다. 아뢰야식은 이와 같은 점에서 보면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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