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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자비를 실천하기 위한 바른 서원(正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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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6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3-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하현주 박사의 마음 밭 가꾸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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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하현주 박사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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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3-05 14:25 조회 1,8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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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자비정원(慈悲正願) (최종회)

건강한 자비를 실천하기 위한 바른 서원(正願)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라는 대중가요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노랫말로 시작한다. 타인을 담을 마음의 그릇에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만 온통 가득한 것은 아닌지 나부터도 당장 살펴볼 일이다.

‘내가 너무도 많다’는 것은 단순한 이기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8월호 칼럼에서 살펴보았듯이, 자기애적 자비, 슬픔에 압도된 자비, 반동형성적 자비, 자기희생적 자비와 같은 유사자비들은 모두 ‘자기몰입적, 자기중심적 태도’라는 공통분모를 갖는다.

우리는 흔히 상대의 고통을 볼 때 ‘나라면 너무 비참할 텐데’ 하며 동정하거나, ‘나라면 안 그랬을 텐데’ 하며 상대의 고통을 평가하거나 비난하기도 한다. ‘상대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무엇을 진정 필요로 할까’가 아니라 ‘나라면’이라는 자기중심으로 치우친 섣부른 조언이나 오지랖을 배려나 자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통받는 이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동요된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감정이 자신에게 전이된 지도 모른 채, 그 고통을 자신으로 인해 발생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아 괴로워한다. 예를 들면, 힘들어하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친구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하고 자신의 행동에서 원인을 찾는 식으로 내부 귀인 하며 자책하는 것이다. 그 친구가 나의 말실수 때문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는지, 가족 문제로 표정이 안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인데도 우리는 과도한 자기몰입적 해석을 일삼곤 한다. 

이처럼 우리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행동이나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원인을 찾으려는 경향성을 지닌다. 이때 그 감정이나 행동이 일어난 원인을 잘못 연결시키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오귀인(誤歸因, misattribution)이라 한다. 실제 현상은 ‘내 잘못’, 혹은 ‘네 잘못’만으로 귀인 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원인들이 얽혀 만들어진 것이므로, 누구의 탓으로, 무엇 하나로만 귀인 하는 것은 대개 오귀인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고통받는 타인과 연결을 유지하면서도 자기몰입적 해석과 같은 오귀인을 벗어나 건강한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좋을까? 

특히 정서전염의 과정처럼 그 감정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밝히기 어려운 경우, 관념적 원인 찾기는 두 번째 화살을 또 맞는 것과 같다. 나 자신이나 상대에게서 고통이 느껴질 때, 고통이 나쁘다는 평가를 내려놓고, 다만 그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변화에 마음 챙김 하며 있는 그대로의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 좋다. 실재를 온전히 체험하면 고통이라는 정서적, 신체적 각성 상태는 3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관념으로만 처리된 고통은 몇 시간이고 몇 달이고 오래 지속될 뿐 아니라 체험될 때까지 무수히 반복된다. 

한편, 그 고통에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붙이고 바라볼 때, 고통의 감각을 판단 없이 온전하게 경험하기란 어렵다. ‘나의 것, 너의 것’으로 분별하기보다 하나의 흘러가는 현상으로, ‘우리의’ 고통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상대도 나도 지금 고통 속에 있구나. 우리의 고통이 함께 사라지기를, 우리 모두가 함께 평온하기를’ 하고 마음속으로 염원하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활성화된 자신의 내적 상태를 편안한 미소를 통해 긍정적 정서 상태로 전환하는 것도 좋다. 

신영복 선생은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했다. 거창하게 누군가를 돕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우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는 이와 함께 말없이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상대가 요청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섣불리 조언하거나 개입하지 말고, 그가 그 고통을 이겨낼 심지를 가진 온전한 존재임을 믿어주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도 꼭 도움을 주고 싶다면 침묵 속에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해 따뜻하고 순수한 주의와 응원하는 마음을 보내는 편이 낫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이 사람이, 나아가 내가 아는 사람,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게까지 진심이 담긴 자비의 염원을 더 자주 보내며 살아가면 어떨까? ‘우리 모두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평온하기를,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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