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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7-22 14:08 조회3,89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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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지금 고구마 천지다. 납작납작하게 썰어서 쪄낸 고구마가 여섯 단짜리 식품건조기는 물론이려니와 거실과 건넌방에 펼쳐진 전기장판 위에서 몸을 지지는 중이다. 이른 바 고구마 말랭이 만들기. 달짝지근한 냄새가 온 집안에 훈풍처럼 번진다.

 

남은 고구마가 너무 많아서 두어 차례 더 쪄서 말려야 한다. 놔두고 쪄 먹거나 생으로 깎아먹으면 될 텐데 쓸데없이 일을 만들고 있다고 지청구를 하거나, 살림 솜씨가 알뜰살뜰한 모양이라고 웃어줄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으나. 둘 다 정답은 아니다. 두고 먹기에는 고구마 상태가 불량이고, 달리 건사할 방법이 없어서 고구마 말랭이 만들기라는 거사(?)를 감행한 것일 뿐.

 

며칠 전 고구마 20kg이 배달됐다. 고구마로 유명한 곳을 여행 중인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전화를 하니 고구마가 달고 싱싱한 데다가 겨우내 두고 먹어도 까딱없다는 농부의 말이 믿고 보내는 것이라며 고마우면 맛있게 먹기나 하란다.

 

친구의 당부와 달리 나는 고구마를 아껴 먹기로 했다. 촉촉하면서도 달고 부드러운 고구마를 두고두고 오래오래 먹고 싶기도 했지만, 고구마를 먹을 때마다 친구 생각을 하고 싶어서였다. 깎아 먹으면 아삭하고 쪄 먹으면 쫀득한 고구마에서 고구마보다 몇 배 더 다디단 친구의 정이 물씬 풍겨났기 때문이다.

 

고구마를 썩지 않게 오래 보관하려면 가장 먼저 고구마의 수분을 제거해야 한다. 고구마는 바로 캐서 바로 먹는 것보다 어느 정도의 숙성 기간을 거쳐야 맛이 있고, 숙성 기간이 길어지는 만큼 단맛이 더 깊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조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신문지를 펴놓고 그 위에 고구마를 널어서 사흘에서 1주일 정도 수분을 말려준 후, 공기구멍을 낸 박스 밑바닥에 신문지를 한 장, 그리고 신문지로 고구마를 하나씩 싸서 차곡차곡, 맨 위에 다시 신문지 한 장을 덮고 상자를 닫아서 서늘한 곳에 보관하면 끝~!

~! 끝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겨우내 먹을 고구마의 단맛과 추운 날씨를 따뜻하게 녹여줄 친구의 우정에 콧노래를 부르며 고구마 갈무리를 시작했던 나의 손놀림이 이내 시들시들해지고 말았으니.

 

상자를 열자마자 보란 듯이 내 눈을 사로잡았던 최상품의 고구마-보랏빛이 도는 진한 자주색에 모양도 매끈매끈, 적당하고 고른 크기의 고구마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른 주먹을 두 개 모아놓은 것처럼 큼지막한 게 있는가 하면 가래떡보다 가느다란 것도 있고, 울퉁불퉁한 모양에 거무튀튀한 색깔이 태반이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상태는 더 나빠서 썩은 것, 곰팡이가 핀 것, 농기구에 찍힌 것까지.

 

성한 것 반, 상한 것 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이쯤 되면 호갱虎客이 아닌가. 농심農心이 천심天心이라는 말도 옛말이다. 친구의 우정이 농락당한 것 같아서 언짢기도 했지만, 땅을 일구며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소박하고 진실한 사람이라 믿었던 농부로부터 거듭 뒤통수를 맞고 보니 그 배신감이 더욱 컸다.

 

거듭 뒤통수를 맞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난여름의 옥수수 사건 때문이다. 지역 농협 작목반을 통해 주문한 찰옥수수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약속했던 날로부터 사흘을 넘기고 배송된 것쯤이야 어이가 없긴 해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맛있는 찰옥수수를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설렘이 더 컸으니까 말이다.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고, 그렇게 많은 옥수수를 삶아본 적도 없는 터라 옥수수수염이 까맣게 말라비틀어지고 껍질이 누렇게 뜬 것도 원래 그런 것이려니 여겼다. 하지만 커다란 찜통 두 개에, 두 번에 나누어 삶은 옥수수는 도대체가 말랑해질 줄 몰랐다. 물론 맛도 없었다.

 

급기야 SOS를 했더니 앞집 아주머니가 혀를 차며 하시는 말씀이, 여물어도 너무 잘 여물어서 종자로 쓰면 그만이겠단다. 풋옥수수로 먹기에는 구제불능이니 알알이 까서 냉동해 두고 밥할 때나 한 줌씩 넣어 먹으라며, 이렇게 마른 옥수수를 모르고 보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농협 작목반에 전화를 해서 여차여차, 이렇게 저렇게 됐다는 이야기를 했다. 배송이 늦어진 건 주문량이 폭주했기 때문이고, 주문량을 맞추다 보니 출하시기를 넘긴 옥수수가 배송된 것 같다는 답이었다.

그렇다면 소비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실수로 그렇게 된 것이니 이해해 달란다. 반품을 받거나 재 배송을 해 주는 게 옳은 것 같다고 슬쩍 찔러봐도 역시나 죄송하다,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말뿐. 냉정하게 따져 보자면 나는 손해 볼 수 없으니 네가 손해 보라는 얘기였다.

시시비비를 가려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으면서도, 그때도 나는 지금 같은 배신감을 느꼈었다. 내가 바랐던 건 농부의 자존심이었다. 애당초 그런 잔머리는 굴리지 말았어야 했고, 설령 실수였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붙인 농산물에 문제가 있다면 그 어떤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책임을 지겠노라, 스스로 적극적인 대처를 하는 게 맞다. 그런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의외로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미주알고주알 따져 보자면 이런 일은 결코 적지 않았다. 농산물도, 수산물도, 육류도, 썩거나 심하게 상처 난 것, 볼품이 없거나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은 이번에 내가 받은 고구마처럼 대개는 다 상자나 포장된 밑에서 나왔다. 남을 속이기에 앞서 자신을 속이는 일이 선뜻 내키기야 했겠냐만, 알고 한 일일 게 분명하니 그 한 번이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되고 만다.

 

어떤 답을 듣게 될 것인지 짐작이 됐지만 재발 방지 차원에서 귀찮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아가며 고구마 농장으로 전화를 했다. 그럴 리가 없단다. 보관을 잘못하면 그럴 수도 있단다. 끝내 내 탓은 없고 네 탓만 있는 농장주에게 그가 자신하는 고구마 10kg을 다시 주문했다. 상한 고구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마음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니 속이 다 시원했다.

세상에 밑바닥까지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시 배송되어 온 고구마는 색깔도 모양도 신선도도 흠잡을 데가 없는 최상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양도 넉넉했다. 때아닌 고구마 풍년에 고구마를 다듬고 찌고 썰어 말리면서, 땀 흘려 일한 농부의 수고가 감사로 되돌려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은 많지만 욕심을 근심하는 사람은 적다. (중아함경)’라는 말씀은 그만큼 욕심을 버리는 일이 어렵다는 경계의 말씀이기도 하다. 건강한 욕심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도 하지만 지나치면 불행과 파멸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어리석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