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위드다르마 연재글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지혜의뜨락 | 이솝 우화 속 배려의 미학

페이지 정보

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0-07-29 11:59 조회3,666회

본문

이솝 우화 속 배려의 미학

 

이솝우화는 생애주기별로 꺼내어 새겨볼 필요가 있다. 어린시절에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였고, 청소년기에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 교훈이었다. 그런데 장년기에는 사회적 배경으로 해석하게 되더니 노년기에 가까워지자 이제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이렇듯 이솝우화에는 인간의 삶을 성숙시키는 코드가 있다.

 

나에게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는 이솝우화는 토끼와 거북이’, ‘여우와 두루미이다. 토끼와 거북이는 우리 사회가 약자를 위해 어떤 배려가 필요한지를 말해주고 있고, 여우와 두루미는 개개인 사이에서는 어떤 배려를 해주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거북이의 값진 승리

옛날 옛적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고 있었다. 토끼는 매우 빨랐고, 거북이는 매우 느렸다. 어느날 토끼가 거북이를 느림보라고 놀려대자, 거북이는 토끼에게 달리기 경주를 제안하였다.

경주를 시작한 토끼는 거북이가 한참 뒤진 것을 보고 중간에 잠깐 쉬다가 잠이 들어버린다. 잠에서 깬 토끼는 전속력으로 달리지만 결과는 거북이의 승리였다.

꾸준히 노력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 어렸을 때는 느리다고 거북이를 놀려대는 토끼가 너무 미웠다. 내가 중증의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나는 또래 아이들이 쉽게 하는 일들을 못하거나 하더라도 매우 느렸기에 거북이에 나의 감정이 이입되어 있었다.

 

토끼는 신체적으로 우월한 조건을 갖고 태어났다. 부모 덕에 많은 강점을 갖고 있는 사람을 요즘 세태에서 금수저라고 하는데 토끼도 금수저이다.

그에 반해 거북이는 신체적인 약점이 있어서 장애인으로 인식될 수도 있고, 흙수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리고 흙수저와 금수저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문제이기에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한다는 발상은 예술 영역이다. 그런데 토끼가 거북이에게 패배한 것은 자만심 때문이다. 상대를 얕잡아보는 교만이 어이 없는 실패를 만들어냈다.

이렇듯 노력하면 승리하는 결과는 문화 영역이다. 문화는 그 사회가 수용하는 관습이어서 노력에 대한 보상이 있다는 문화가 형성되면 공정한 사회가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도저히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거북이가 이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복지 영역이 필요하다. 사회 안전망을 깔아주는 것이다. 복지는 우리 사회 약자들에 대한 배려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토끼와 거북이는 나와 타자의 경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부지런함과 게으름의 경쟁인지도 모른다. 근면한 마음이 강할 때는 열심히 노력하게 되지만, 어느 순간 쉬고 싶고, 일하기 싫어서 나태함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경기는 타자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는 것이다. 긍정이 이기면 부지런한 성실함이 빛나는 것이고, 부정이 이기면 게을러져서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두루미의 통쾌한 반격

심술꾸러기 여우가 두루미에게 한 턱 낼테니까 우리 집에 놀러와.’라고 하면서 두루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여우는 두루미에게 일부러 납작한 접시에 담긴 수프를 내밀었다. 두루미는 부리가 길기 때문에 수프를 먹을 수 없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여우는 맛있게 수프를 먹었다.

 

얼마 후 두루미는 여우에게 예전에 음식 대접을 잘 받았으니 이번에는 내가 한 턱 낼테니까 우리 집에 와.’라며 여우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두루미는 여우에게 일부러 고기를 주둥이가 긴 병에 담아서 내밀었다. 여우는 부리가 없기 때문에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두루미는 여우가 그랬던 것처럼 맛있게 고기를 먹었다.

 

여우와 두루미는 누가 더 강점이 있느냐를 따질 필요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다양성의 문제이다. 여우와 두루미는 먹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어느 것이 더 좋고, 어느 것이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다를 뿐이다.

 

여우가 순수한 마음으로 두루미를 초대했다면 손님을 위해 두루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두루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세세히 살펴서 준비를 했겠지만 여우는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없었다.

두루미를 약올려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두루미도 여우의 속마음을 잘 알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응징을 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갑과 을로 나뉘여서 갑은 갑질을 하고 을은 을질을 한다고 서로를 공격한다. 사용자와 근로자가 존재하지만 그 역할이 다를 뿐 갑질과 을질이라는 비정상적인 행위를 할 필요는 없다.

 

장애인과 비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장애 때문에 인간의 본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장애를 보완해주는 욕구가 필요한 것 뿐이다. 다르다는 것이 갈등의 요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서로를 배려해주면 아주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다.

 

부처님의 배려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 아나율은 불면不眠으로 정진을 하다가 실명을 한다. 부처님이 아나율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아나율이 자기 옷을 깁고 있었는데 아나율은 앞을 볼 수 없게 된 후에도 실명 전에 하던 실력으로 바느질은 그런대로 할 수 있었지만 바늘귀를 끼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아신 부처님께서는 아나율을 위해 직접 바늘귀를 끼워주셨다고 한다(증일아함경). 그리고 아나율은 앞을 못보는 것이 아니라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며 아나율의 장애를 무능이 아니라 장점으로 만들어주셨다.

 

인간적으로 다가가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존귀한 존재라고 일깨워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배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