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자비와 깨달음으로 신의 구원을 넘어서는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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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10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9-01 신문면수 4-5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페이지 정보
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9-16 14:26 조회 2회본문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3절 각종 논설
10. 불교(佛敎)적 인생관(人生觀)과 기독교적 인생관
불교(佛敎)는 기독교(基督敎)보다 포옹성(抱擁性)과 관용성(寬容性)이 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예수를 통(通)하지 않으면 천당(天堂)에 갈 수 없다는, 즉(卽) 신(神)과 인간(人間) 사이에 예수라는 중계자(仲繼者)가 있어서 반드시 그에 의(依)하여서만 구원(救援)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思想), 인간(人間)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地獄)에 간다는 사상(思想)이 옳을까. 인간(人間)으로서 나무랄 데가 없는데 다만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理由) 하나로 지옥(地獄)에 떨어진다는 것은 모순(矛盾)이다. 여기에 죄(罪)에 물들지 않는 훌륭한 인격자(人格者)가 있다고 하자. 비록 그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면 과연(果然) 그에게 벌(罰)을 줄 수 있겠는가. 예수를 믿거나 아니 믿거나 간에 훌륭한 사람은 구제(救濟)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구제라니 지옥(地獄)에 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에 원죄설(原罪說)의 모순(矛盾)이 있다.
초등학교 1~2학년 즈음, 시라는 것을 처음으로 썼는데 제목이 ‘부처님’이었다.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첫 구절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나에게 부처님은 하나밖에 없는 신이시다.’ 어린 마음에도 부처님이 어찌나 좋던지 온갖 헌사를 늘어놓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때는 신이 뭔지,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부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쏟아냈던 것 같다.
부처님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부처님의 위대함은 더 크게 다가왔다.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거나 인간의 삶을 주재하는 신은 없으며, 우리 스스로가 인생과 세상을 이끌어가는 주인이라는 가르침은 가슴을 뛰게 했다.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최고, 최상의 인간상을 보여주셨기에 더 존경스러웠다.
부처님을 마냥 좋아해 신처럼 여기던 때, 우연히 구역 예배를 구경하게 되었다. 이모 댁에서 놀다가 예배하기 위해 모인 신자들 틈에 낀 것이다. 그때 그분들은 사탄에 관해 공부했다. 열 가지 종류의 사탄이 열거되었는데 그중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가 사탄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아무리 선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사탄이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예배가 끝나고 이모에게 물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분도 그러면 지옥에 갔냐고. 이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했다. 바르게 살기만 하면 종교가 무엇이든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는 건 사탄이 하는 말이라고 못 박았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존재 자체도 가슴에 와닿지 않았는데 선행과 마음 씀보다 신에 대한 믿음이 우선이고 전부라는 데에서 마음은 완전히 닫혔다.
부처님이 신이 아니라서 더 좋았다. 부처님의 생애를 공부하고 교리와 경전을 배우며 신심과 확신은 깊어졌다. 우리 모두 부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동경심을 키웠고, 나도 그 길을 가보겠다고 용기도 냈다. 공부하면 할수록 자부심과 자긍심은 높아갔다.
퇴근이 늦어 두 아이를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맡겨놓은 어느 날, 집에 오는 내내 입이 삐죽 나온 게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인지 물으니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둘러앉아 놀다가 절에 다니는 사람이 있냐고 해 둘째가 손을 번쩍 들었더니 약속이나 한 듯이 ‘지옥 간대요, 지옥 간대요’ 하며 놀렸다는 것이다. 큰아이는 그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 가만히 있지 않고 손을 든 동생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절에 다닌다는 친구에게 대뜸 지옥 간다고 했다면 그건 모두 어른들 탓이다. 순수한 동심을 편협한 종교관으로 물들여놓은 어른들에게 화가 났지만 뭐라고 달래야 할지 난감했다.
하루는, 둘째 아이가 막대 사탕 하나를 받아와서는 신나 했다. 토요일이면 하굣길에 전단지 쪽지와 자그마한 알사탕 2개를 받아오던 아이는 막대 사탕을 받은 게 못내 좋았던 모양이다. 어디서 났냐고 물으니, 어떤 아저씨가 주면서 같이 기도하자고 했단다. 뭐라 기도했냐고 물으니 아이의 머리를 감싸 쥐고는 이 아이의 원죄를 용서하시라 했단다. 욱, 하고 치밀어오르는 걸 꾹꾹 누르며 말했다. ‘너에겐 아무런 죄가 없어. 너는 너무나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야. 너는 그대로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야.’ 이웃 종교인들의 일방적인 강요와 무례할 정도의 집요함에 불편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소리가 높을수록 거부감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우리 불자들은 어떤가? 믿음과 확신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한때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불교계와 불교인에게 불만이 많았다. 공부하지 않고 자세히 안내해 주지도 못하는 것이 싫었다. 어려운 말만 반복하면서 쉽게 알려주지도 못하고 가깝게 느낄 기회도 만들지 않는 구태의연함이 싫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무심함이 답답하고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차피 때가 있는 법이고 인연이 성숙해야 한다. 부처님을 찾게 될 때가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가올 때가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억지를 부리고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말했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스님이나 저명한 학자나 존경받는 누군가가 말했다고 해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천하여 진정으로 이익과 행복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받아들이라 했다. 원융무애함이 불교의 참모습이다. 융화하고 포용하는 넉넉함과 너그러움이 불교의 미덕이자 교리 자체가 그렇다. 상식적으로도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절대적으로 내가 옳다는 신념은 대립과 갈등을 낳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종교관이 없을까? 솔직히, 창조주나 절대신을 믿는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우월감 같은 게 있는 게 사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위대하여 그 어떤 종교나 철학도 비할 수 없고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불교만이 최고라 여기며 얕잡아보거나 다른 이들의 훌륭한 이야기에 눈감아버리기 쉽다.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배운 게 있다. 정말로 공부 많이 하고 열심히 수행하고 진실로 베푸는 사람은 하나같이 자신을 낮춘다. 한 스님의 블로그에서 본 글을 잊지 않으려 한다. “윗사람에게 겸손한 사람은 반듯한 사람입니다. 아랫사람에게 겸손한 사람은 따뜻한 사람입니다. 동료에게 겸손한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겸손한 사람은 깨달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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