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일치(祭政一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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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11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10-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지혜의 눈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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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10-13 15:08 조회 49회본문
지배층 권위를 뒷받침해 주는 이념
불교는 오직 수행과 평화의 종교로
역사적으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그 출발에서 한 몸으로 작용하여 제정일치(祭政一致)의 형태를 띠었다. 말하자면 지배층의 권위를 뒷받침해 주는 이념으로서 종교가 작용하였기에 제사장이 정치적 지배자를 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유일신교나 다신교나 모두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神)으로부터 통치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통치자는 신의 의지를 대변하는 존재였다.
여기에서도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인간세계에 직접 개입하는 인격신으로서의 신을 전제하는 계통이 있다. 이런 계통은 끊임없이 신의 의지를 묻는 과정을 되풀이하는데 보통 점을 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중국 상(商)나라의 갑골문은 정인(貞人)이 점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중요한 일이 있으면 신탁(神託)하였고, 사실 아브라함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총칭하는 표현-의 경전 내용도 신의 말씀을 인간이 기록한 것이다.
중세 유럽은 기독교에 의해 지배받았던 신정정치가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가 유행하면서 이신론(理神論, Deism)이 인격신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과학의 발전을 꼽는다. 흥미로운 것은 유교의 대두인데, 상(商)을 뒤이은 주(周)나라가 대두하면서 상의 신인 제(帝)를 대신해서 천(天)이 등장한다. 이 천(天)은 이신론적 요소가 강한데 춘추시대의 공자(孔子)에 의해 천이 인격신의 요소가 줄어들고 비인격적인 성질, 즉 이신론적 성격이 강해진다.
물론 유교의 천은 인격신의 요소도 여전히 강하게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한(漢) 나라 때 유행한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이다. 그러나 이후 위진남북조와 수당(隋唐)대를 거치면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장악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유학자들은 송(宋)대에 들어와 성리학을 성립시킨다. 성리학은 유럽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거의 정설처럼 굳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의 성격이다. 수당대에 중국 사상계를 장악한 불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았지만 정치에 깊게 개입하지는 않았다. 즉 불교에도 정치사상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출가 사문은 사회적 관계와 단절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정치와의 유착 관계가 깊을 수 없었다. 비록 국가의 보호와 지원을 받았지만 불교가 정치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사례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정치에 개입했다고 하여도 그 정도가 깊지 않았고 기간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러한 불교의 성격은 종교를 전파하는 수단으로서 전쟁을 이용하지 않았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반드시 직접적인 인과관계라고 볼 수 없지만 세계 종교 중 불교 신도의 숫자가 가장 적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한국의 정치에 무속부터 통일교나 기독교 계통의 신흥 교단까지 깊은 관련이 있었고 정치적 개입 정황도 점점 드러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통 보수 기독교계의 인물들도 관련되어 있음이 확인돼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물론 일련정종 계통 일본의 토착화된 불교도 거론이 되지만 정치적 개입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신앙과 관련된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불교는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약한 탓에 1980년 정통성이 약한 신군부에 의해 10·27 법난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수행의 종교로서의 성격이 강했기에 이 어려움을 극복해 왔다. 지난 정치사의 어두웠던 종교계와의 밀착 관계가 드러나면서 불현듯 부처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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