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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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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50호 발행인 법공 발간일 2003-11-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지상설법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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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수증원 필자소속 혜정사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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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05 18:50 조회 1,6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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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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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사 수증원 지수

9세기의 선승 임제는 젊어서 황벽산의 희운선사 문하에서 엄격한 수행에 의해 깨달음에 이릅니다. 그 후 스승의 곁을 떠나 고향 가까운 곳으로 옮아 가려고 할 때 스승은 임제에게 일찍이 그 이 스승 백장으로부터 이가의 증표로 받은 선판과 궤안 이 두가지 좌선의 도구를 유물로서 전해 주려고 한다. 이 때 임제는 그걸 가지고 온 시자에게 ‘불을 가 져오너라’고 호통을 칩니다.

득도의 증명이나 전법의 증표를 단호히 거부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그런 물건 따위는 당장에 불살라 버리고 말겠다는 서슬푸는 기상이었습니다. 문제는 수행의 체험인 개안 그 자체에 있는 것이지, 증명서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뜻입니다. 범속한 일상성에 저항하는 것은 그 어떤틀이나 인습에도 안주하지 않으려는 깨어 있는 정신의 꿈틀거림일 것입니다.

선은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선종은 중국에서 일어나 우리나라에서도 그 꽃을 피웁니다. 좌선은 고대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법인데 중국에 들어와서 커 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특히 임제선사에 이르면 선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크게 뒤 바뀝니다.

임제선사는 그의 어록에서 “ 어떤 사람은 배불리 밥을 먹고 좌선하여 선정에 들려고 한다. 망상을 붙들고 놓지 않으면서,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만을 좋아한다. 이 같은 행위는 모두 외도의 짓이다. 일찍이 조사의 말을 듣지 못했는가? 그대들이 생각을 쉬어 고요를 찾거나, 생각을 가라앉혀 삼매에 들려고 한다면 이런 놈들은 모두 가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이 곧 좌선인 줄만 알고 마음을 안정하는 것으로써 선을 삼으려는 해서는 안됩니다.

유마경을 보면 한 수행승이 고요한 숲속의 한 나무 아래 앉아 좌선하고 있는 것을 보고 유마힐에게 말합니다.

“앉아만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좌선이라고 할 수 없소. 현실 속에 살면서도 몸과 마음이 동요됨이 없는 것을-좌선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쉬어버린 무심한 경지에 있으면서도 온갖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을 좌선 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고요에 빠지지 않고 또 밖으로 흩어지지 않는 것을 좌선이 라고 합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앉을 수 있어야 부처님이 인정하는 좌선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선은 앉거나 눕는 데에 상관이 없는 것 이며 부처는 가만히 앉아 있는 부동자세가 아니라 어디에나 집착이 없어서 따로 취하고 버릴 게 없는 것이 진짜 선이라는 뜻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좌선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좌선의 태도 특히 그 마음가짐의 잘못을 문제 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노력보다는 본래 천진스런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음이 중 요합니다. 그래서 휴정같은 선사도 “본래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으뜸가는 정진이다.”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중생의 마음을 애써 버리려고 하지 말고 자기의 성품을 더럽히지 말고 바른 것을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선은 좌선으로써 행동의 근본을 삼지만 좌선만이 아니고 일상의 기거동작마다  깨어 있는 삼매의 정신으로 순 화되고 통일 되어야 합니다

임제선사는 “그대가 바른 견해를 얻고 싶거든 타인으로부터 미혹을 입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바로 없애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없애고, 성자를 만나면 성자를 없애라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되느니라."

부처나 조사, 전통이나 스승을 최고 가치로 삼을 경우 스스로 얽어매는 것입니다. 선사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나 조사, 성자나 스승에게 의존하게 되면 새로운 가치창조를 방해받기 때문입니다. 종교 그 자체로부터의 해방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은 이와 같이 창조를 존중하면서 모방을 배격합니다. 선사가 내세운 바른 견해란 거리낌없는 청정한 지혜이고 열리는 눈 입니다.

인도의 불교가 적어도 초기불교에 있어서 인간부정으로부터 출발한 것과는 대조 적으로 선불교는 현실의 인간을 무조건 긍 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선은 설명이나 해설에 의해 진리를 인식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진리를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마음 밖어서 찾지 말라 하고, 문으로 들어 온 것은 집안의 진정한 보배가 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얻어들은 지식이나 정보는 언젠가 흩어져 날아가 버릴 먼지 같은 존재입니다. 거리낌 없는 지혜야말로 그 사람의 무게를 이루고 그의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머리와 입만 커다랗게 열려 있지 가슴과 발은 점점 퇴화되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극히 관념적이고 추상 적인 인간으로 팔팔한 생명의 빛을 잃어가 고 대지와의 관계가 그만큼 멀어지고 있습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대지는 모든 생명의 근원인 것입니다.

선은 대지와 밀착할 수 있는 마음과 몸의 단련입니다. 그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당당하게 홀로 직립하는 모습과 새삼스레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좌선 그 자체가 본래적인 자아의 살아있는 모습이고 대안락의 법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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