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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개혁합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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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58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4-08-02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총지칼럼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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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5 10:43 조회 1,30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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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개혁합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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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불교 연구로 철학 석사 (1994)
스토니부룩 대학교 불교 연구

오늘날 한국 불교계에는 종파를 초월한 공통된 문제가 있습니다. 개별 종단 마다, 개별 사찰마다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있겠지만 그 문제들의 근원을 추적해 가면 한 곳에 이릅니다. 그것은 현대의 사회 문화적 환경에 대한 구체적 이해의 부족입니다.

현대 사회에는 수많은 사상적 조류가 서로 뒤얽혀 있고, 온갖 기이한 문화적 현상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각기 자신들의 이념의 실현 을 위해 목청을 돋우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가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또 텔레비전은 뉴스와, 드라마와, 쇼를 통해 천태만상의 풍경들 을 만들어 가고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더욱 이 한국 사회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리 변화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거리에는 수십 층의 새 건물이 솟아오르고, 형형 색색의 기기묘묘한 새로운 차들이 그 사이를 달리고 있습니다. 여자들의 옷차림 새가 수시로 변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얼굴과 몸뚱이조차 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환경을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모두들 꼭두 새벽부터 일어나서 숨가쁘게 뛰어다닙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도 사람 들은 활동을 멈추지 않습 니다.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온몸의 기력이 몽땅 소진되어서야 잠자리에 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도태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 상 속에서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의 불교도들 입니다. 한국 불교가 시대의 흐름에 뒤쳐져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뒤쳐져 있는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불법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것이다”라고 하며 목탁만 두드리고 있습니다.

불법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합니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이 오늘 이 순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무시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오늘 벌어지고 있는 일들 속에 뛰어 들고 해결한 연후에야 초촐할 수 있습니다. 

흐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생사의 문제 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서 숲으로 간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바로 숲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진리를 구하기 위해 먼저 간 곳은 숲이 아니라 뭇 사상가들이 모여 있던 코살라 국의 수도로 갔습니다. 부처님은 그곳에서 당대의 사상 조류들을 두루 배운 연후에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숲으로 갔습니다. 물론 부처님은 당시 도시의 사상가들에게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도 또한 참입니다. 만약에 부처님이 도시에서 배운바 없이 바로 숲으로 가셨다면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아마 아집과 망상 속에 살다간 한 지적인 방랑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만 여러가지 사상을 섭렵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닙니 다. 진리를 깨친 연후에도 역시 새로운 사상들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불교 승려들은 깨쳤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번 깨치고 나면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 니다. 이러한 생각은 깨달음을 도식적으 로 이해하는 데서 오는 순진한 사고의 결과입니다. 깨달음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깨달음은 매순간 새롭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새 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삶의 문제를 안고 오는 사람들에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불법이 인도에서 중국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 가를 보면 깨달음이 왜 역동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중국에 불법을 전한 스님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공부를 한 사 람들입니다. 당시의 스님들은 결코 불법 의 진리를 깨친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유학 경전들을 공부하고 도가의 철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았 다면 불교는 중국 땅에 전파되지 못하였 을 것입니다.

불교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 역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사상들을 공부하고 진리를 재해 석해왔기 때문입니다. 불법과 유학과 도가 가운데서 가장 열려 있는 것이 불교 였습니다. 유학자들은 유학만 공부하고 불법과 도가사상을 배척해왔습니다. 도가 역시 불교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스님들은 유학과 도가사상 모두를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불법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만 유학과 도가사상은 쇄락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불교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인들이 새로운 철학과 사상 조류를 알려고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철학과 사상은 새로운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과 사상을 안다는 것은 중생들의 새로운 고통과 염원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은 언제 어디서나 중생을 괴롭히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것들은 시대적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생로병사를 말하는 것으로 중생의 고통을 모두 말하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중생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중생들을 옥죄고 있는 독특한 방식의 삶의 질곡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로 이 시대의 철학과, 사상, 문화 조류를 이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중생을 인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교인들의 사명은 무명중생의 눈을 열어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이 사회에서의 무명중 생이 누구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 불교인들이 일반인들보다 더 깊은 무명에 쌓여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한국의 불교인들은 여타의 종 교나 사상, 단체, 사람들에 비해 현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뒤떨어지고 있 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코 가벼이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세속의 지식은 결코 세속의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또한 불법의 진리가 있기 때문 입니다. 법화경에 의하면 과거의 부처 님들은 무량무수의 방편과 종종의 인연 과 비유로서 중생을 위해 온갖 가지 법 을 설하셨다고 합니다. 이 무량무수의 방편 가운데는 분명 오늘날의 여러 사상 들과 유사한 법문들도 틀림없이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방편이 방편에 머물고, 나쁜 지식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은 결코 그것들이 처음부터 진리를 결 여한 방편이거나, 나쁜 지식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방편과 지식은 어떻게 운용하 느냐에 따라 진리가 되기도 하고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과거 부처님들의 무수한 방편과 오늘날의 다양한 지식은 모두 하 나의 궁극적 진리, 부처님의 진리 속에 담겨져야 합니다. 또 역으로 하나의 진리는 무수한 방편으로, 오늘날의 다양한 지식과 문화 속에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방편과 지식 그 자체에만 머무는 것이 무명 중생의 모습이듯이, 방편과 지식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의 것으로 보는 태도 역시 진리의 본질을 모르는 태도입 니다. 전자가 오늘날 불교를 모르는 일반 중생들의 태도라면, 후자는 옛 불교만 알고 오늘날의 지식을 모르는 고루한 불교인들의 태도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새로운 문화를 익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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