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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조국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벅찬 사명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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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8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1-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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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1-11 13:56 조회 58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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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종조 원정 대성사 일대기 (15회)

해방된 조국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벅찬 사명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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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광복이 왔다. 갑작스런 해방을 맞아, 한편에선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또 다른 편에선 혼란의 움직임이 있었다. 각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해방을 자축하는 인파들이 몰려나와 행렬을 이루었다.

군민대회나 면민대회 등을 통해 경찰서와 행정기관을 접수하는 곳도 있었다. 악질 친일파에 대한 비난도 거세졌다. 좌와 우의 격돌이 이어지고, 더해서 친일파에 대한 단죄 요구까지 그동안 억눌렸던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대성사의 고향 밀양도 혼란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성사는 적십자사 위원으로 군청에서 근무하여 업무가 일제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해방 정국에도 공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혼란 속에 구호 업무는 오히려 일거리가 늘었다.

밀양에도 인민위원회가 생겼고, 1946년 10월 대구에서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에 항의하는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생필품 부족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억눌린 민심이 폭발한 것이다. 

대구 사태는 인근 영천으로 이어졌고, 밀양의 민심도 고요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합법적인 활동을 벌이던 공산당이 불법화되어 일부는 월북하고 또 일부는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의 전신인 야산대野山隊가 되어 경찰지서와 우익청년단 사무실 등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제의 침략과 만주의 독립전쟁,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모두 겪은 대성사는 민심과 현실의 고난을 더 깊이 고민하게 된다. 

세상은 고해이며 삿된 욕망은 고통을 더 크게 할 뿐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실 속에서 또렷하게 지켜본 것이다. 이때부터 불교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더 깊어졌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마음과 수행이라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미군에 의해 치안과 행정 업무가 집행되고 있었는데, 대성사는 미군정으로부터 밀양공립농잠중학교의 행정관에 임명돼 학교 행정 업무를 전담하게 된다. 과거 공직을 시작한 것도 교육위원회의 일이었고, 혼란의 시기에 인재 양성은 새로운 조국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일을 맡게 된다.

밀양공립농잠중학교는 1924년 3년제의 밀양공립농잠학교로 개교하여 해방 직후에는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을 아우르는 6년제로 변경됐고, 이후 70년대에는 전문대학으로 바뀌었다가 현재 부산대학교에 통합돼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로 변경되었다. 밀양, 진주 등지는 양잠산업이 발달했는데, 밀양공립농잠학교가 영남 일대 섬유 산업의 인재를 키워내는 모태 역할을 한 것이다. 

해방된 조국의 산업 기술 인재를 양성하는 벅찬 사명감과 기대에 꼭 맞는 인물로 대성사가 선발된 것이다. 밀양공립농잠중학교는 높은 교육 수준으로 인해 기술을 배우러 당시 밀양뿐 아니라 김해와 진주 등지에서도 진학하는 명문 학교였다. 그러나 시대의 조류에 따라 학생과 학교 전체는 좌익에 경도돼 있었다. 학생과 교사들까지도 이념과 사상을 드러내며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이런 격동 속에서도 대성사는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 어떤 극단적인 길도 여의어 중도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펼치신 중도와 정견, 치우치지 않는 바른 사유와 인욕의 가르침이 현실 속에서 더 분명해졌다.

이 시절의 대성사는 누구의 편을 들거나 이익을 좇거나 하지 않고 불편부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늘 하던 대로 정확한 시간에 흐트러지지 않는 몸가짐으로 등교해서 해야 할 일을 처리했다. 덕분에 좌와 우, 학교 당국과 학생들 어느 편으로부터도 비난과 항의가 없이 학교 업무를 차질 없이 집행했다. 선택을 강요하고 나의 편에 서지 않으면 모두를 적으로 돌리던 시절에 교육 행정관으로서 자신의 할 일을 치우침 없이 처리했다. 워낙 원칙을 지키고 사사로운 정에 따라 행하지 않았기에 약간의 불만은 있었어도 원한을 사거나 크게 반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이념 투쟁과 정치적 이해의 대립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대성사는 오히려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주말이면 가족을 돌보거나 표충사에 들러 불교 수행관을 깊이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자신을 던져 고해의 민중을 구하고자 했던 사명당 유정 대사를 기리는 사당이 있는 곳으로, 애국과 수행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배울 수 있는 도량이다.

하지만 개인의 평온한 시간이 주변의 불길한 분위기를 바꿀 수 없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운명은 점점 고난의 불씨가 커졌다. 대성사는 닥쳐올 운명의 불길을 예감한 듯 학교 업무가 끝나면 불교 관련 책과 경전들을 모으고 살펴보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참선과 명상에 깊은 시간을 보냈고,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불보살의 명호를 외는 칭명염불(稱名念佛)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수행하는 일이 잦았다. 

미군정이 뿌리를 내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사회는 또 한 차례 격동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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