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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력, 나를 버리는 수행으로 얻어지는 과보이자 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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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9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12-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읽는 종조 법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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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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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12-14 15:25 조회 2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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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력, 나를 버리는 수행으로 얻어지는 과보이자 공덕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1절 밀교란 무엇인가


4. 불교(佛敎)의 신통력(神通力)


불타시대(佛陀時代)에는 모든 종교의 성자(聖者)들은 기적(奇蹟)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교에도 불타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성자 아라한(阿羅漢)들은 육신통(六神通)을 통달(通達)했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도 빈두로(賓頭盧)와 연화색니(蓮華色尼)의 신통력은 유명했다. 불타가 포교활동을 개시할 당초에 가섭(迦葉)이 제자(弟子)가 된 것은 신통력을 겨루어서 이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사위성(舍衛城)에서도 불타의 신통력은 발군적(拔群的)이었다. 이상의 사실은 한역(漢譯)과 팔리어 성전(聖典)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또 이러한 기사(記事)가 후세의 가필(加筆)이라고 단정(斷定)할 이유는 없다. 다만 여기에 주의할 것은 신통력을 함부로 과시(誇示)하여서는 안 된다는 불타의 지령(指令)이다.

어느 때 사위성(舍衛城)에서 한 사람의 시민(市民)이 긴 죽간(竹竿) 끝에 값비싼 탁발용(托鉢用) 바루를 얹어 놓고 “날아올라 잡는 사람에게 그저 주겠다.”고 선언(宣言)했다. 거기에는 불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종교의 수행자가 있었으나 빈두로(賓頭盧)가 신통력으로서 공중에 날아 올라가서 이것을 손으로 잡았다. 이 말을 들은 불타는 빈두로를 매우 꾸짖고 “대중이 보는 앞에서 신통력을 과시하는 것을 엄금(嚴禁)한다.”고 하였다. 대저(大抵) 신통력이란 번뇌가 없이 정신이 통일(統一)된 초능력적(超能力的)인 경지(境地)에서 가능(可能)한 것이며 특히 밀교의 진언지송(眞言持誦)으로서 더욱 가능하지만(취물取物, 축지縮地 등) 그러한 경지까지 정진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밀교의 삼밀행은 반드시 그 진언의 효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으므로 지금 근기(根機)가 약한 수행자들 자신이 신통력을 발휘(發揮)하지 못하는 반면, 그 주변의 사물(事物)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총지종(總指宗)의 제반신통묘유(諸般神通妙有) 등)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기적을 바란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이적을 동경하고 그런 능력이 있는 이가 있다면 경외시하고 추종한다. 간혹 불가사의한 능력을 보여주는 종교나 무술, 기수련, 혹은 신점 같은 것에 혹하는 것은 그 힘을 빌어 내 삶이 달라지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경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천지가 진동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거나, 부처님과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제자들이 천상과 지옥을 넘나들며 몸을 나투고 독사나 취한 코끼리 등 무시무시한 동물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모습들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부처님께서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신통력을 과시하지 말라고 하신 뜻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중생을 굽어 살피고 구제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면 신통력을 사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랑하는 것은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다. 그리고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신통력을 접한 이들 가운데는 자신의 욕망을 여의고 번뇌 망상을 끊어야 하는 불교수행의 기본을 저버리고 신통에 매달리는 맹신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수행으로 얻어지는 초인간적인 능력은 여섯 가지라고 한다. 어디든지 날아가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신족통,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천안통,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훤히 아는 타심통, 자신과 타인의 과거 전생을 들여다보는 숙명통, 그리고 번뇌를 완전히 끊어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누진통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중에서 신족통,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은 외도나 특수한 경험으로도 얻을 수 있지만 누진통만은 부처님과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이만이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초인간적이고 신비한 능력이라고는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나 능력보다 번뇌를 끊고 갈애와 무명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어렵기도 하고 궁극에 가야할 길이라고 일러주신 것이다.


 요즘은 기계문명이 발달하여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해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이다. 모두가 휴대폰을 펼쳐 전 세계의 소식을 언제든 보고 들을 수 있다. 공간을 초월해 누구와도 이야기 나눌 수 있고 영상통화까지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족통과 천안통과 천이통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디든 갈 수 있다 해도 웬만해서는 기아나 전쟁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에게 달려가지는 않는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도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미처 보지도 못하고, 보더라도 지나치게 마련이다. 애타는 아우성과 하소연 역시 듣지도 못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눈과 귀와 팔다리의 능력이 자유자재하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자비의 마음이 없다면 갖기 힘들고, 설사 그런 능력이 있다 해도 자비롭게 쓰이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도무지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되고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답답하고 힘들 때, 나에게도 타심통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헛된 상상을 해본다. 거듭 닥치는 불운이나 질기고 질긴 악연 앞에서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이 자꾸 이어지는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부처님이 계시다면 당장 달려가 얽히고설킨 인연과 숙업에 대해 여쭙고 싶을 때가 정말 많다. 

 그런데 조금만 더 사유해보면 서운하고 화나고 슬프고 괴로운 것은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내 욕심대로 안 돼 화가 나고 내 생각대로 안 돼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단 한 겹이라도 그 욕망과 갈애를 벗겨내고 바라보면 뿌옇기만 한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하고 나의 문제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노라면 지금도 이렇게 인색하고 성질부리고 꼬였는데 전생에서라고 달랐을까, 짐작도 해본다. 

 아상을 내려놓아야 타인의 마음도 읽히고 나의 욕심과 갈망도 보인다. 나를 고집하는 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장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관계와 상황이 주는 메시지와 오랜 업을 읽기는 더더욱 어렵다. 

 타심통과 숙명통도 이러한데 더구나 번뇌를 모두 끊는 누진통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욕심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모두 벗은 해탈의 경지이니 고행이나 부적이나 귀신의 힘을 빌려 다다를 리 만무하다. 신통력 또한 나를 버리는 수행으로 얻어지는 과보이자 공덕인 것이다.


 진언이 되었든 염불이 되었든 절이 되었든 일념으로 하면 당장 얼굴에서부터 내면 깊숙이에서 우러나는 맑고 환한 빛을 띄게 되고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욕심에 찌든 이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면모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뜻하지 않게 고마운 인연을 만나 좋은 길을 안내받고, 하고자 하는 일들과 소망들이 생각지도 못한 순간, 선선히 이루어진다. 그것이 수행으로 얻은 신통방통한 가피이겠지만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내가 닦은 만큼 기어코 돌아오고야 마는 과보를, 혜안이 열린 이들은 당연한 결과로 볼 것이고 여전히 육안으로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기적이고 신통이라고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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