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신성불의 길, 원정 대성사의 삶과 대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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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10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9-01 신문면수 6-7면 카테고리 종조 멸도 45주기 추선 특집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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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9-16 14:31 조회 7회본문
한국 현대밀교의 개척자
원정 대성사(苑淨 大聖師 1907. 1. 29~1980. 9. 8.)
불교총지종을 창종한 원정 대성사는 일직(一直) 손 씨(孫氏)로서, 휘(諱)는 대련(大鍊), 후일 총지종의 개산과 더불어 정우(禎佑)로 개명했다. 법호(法號)는 원정(苑淨)이다. 1907년 1월 29일 경상북도 밀양군 산외면 다죽리에서 탄생한 원정 대성사는 일찍이 개화의 물결을 타고 현대 고등교육을 마치고 관계와 교육계에 종사했다. 20대에 불교에 뜻을 세운 후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중국 등을 두루 다니며 불경의 수집과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던 중 비극의 6·25 한국전쟁을 만나 전쟁의 참혹함과 도탄에 빠진 중생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호국불교를 통해 나라를 구하고 중생을 구제해야겠다는 대자비의 서원을 세웠다.
6·25 한국전쟁 직후 진각종의 개조인 회당 손규상 조사와 함께 진각종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회당 조사의 입적 후인 1963년부터 총인 자격으로 진각종을 이끌며 『응화성전』, 『총지법장』 등을 편찬하면서 진각종의 교리적, 행정적 기반을 확립했다. 이후 진각종을 떠나 밀교의 비법으로 정진하던 중 1972년 4월 7일 “『대승장엄보왕경』과 준제관음법으로 교화하라.”는 관세음보살의 몽수를 받고 교상 확립에 착수했다.
그해 8월 21일 법신대일여래의 가지력과 대성사의 영명한 통찰력으로 엄격한 의궤와 사종수법을 비롯한 밀교의 기틀이 갖추어짐에 따라 대성사는 오랜 은거의 수렴을 거두고 정법홍포를 발원하셨다. 원정 대성사는 진각종의 중진 스승들과 식견 있는 제자들이 입교개종을 최촉함에 따라 밀교 중흥의 결심을 굳히고 드디어 1972년 12월 24일 비로자나 부처님을 교주로 모시고 불교총지종의 창종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밀교 중흥의 발판 원정 대성사
이 땅 대한민국에 윤원대도(輪圓大道),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정법밀교를 다시 꽃피우게 하신 총지종의 종조(宗祖) 원정 대성사(苑淨 大聖師)! 한국의 밀교는 1,600여 년 전의 불교 전래와 함께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민중을 구제하고 숱한 국난을 극복하며 흥왕했다. 그러나 조선조의 억불정책 속에서 밀교는 쇠퇴하고 통불교 속에서 겨우 그 명맥만을 이어왔다. 이에 한국밀교의 중흥을 위하여 혜성과 같이 나타난 분이 바로 정통밀교 총지종을 창종하신 원정 대성사였다.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밀교사를 돌아볼 때, 천재적 통찰력과 혜안을 지니셨던 원정 대성사께서 해방과 6·25 한국전쟁 이후 어려웠던 당시 사회에서 정신적 치유와 자성 참회를 주창했던 진각종 창종주 회당 조사를 만난 것은 신생 한국밀교의 홍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성사의 해박한 불교지식과 뛰어난 밀교수법(密敎修法)의 수행력과 가르침은 총지종과 진각종뿐만 아니라 한국밀교의 새로운 태동과 밀교 중흥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불교국 고려를 끝으로 사라져 버린 밀교정법이 원정 대성사의 오지신력(五智神力)으로 하나하나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한국의 현대밀교는 기나긴 잠을 깨고 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잊혀졌던 밀교의 비법(秘法)과 경궤(經軌), 다라니(陀羅尼)와 수법(修法) 등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통불교 일색이었던 한국의 불교계에 ‘밀교’라는 말을 처음 전파했던 분이 바로 원정 대성사인 바, 이에 불교사적 평가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창종과 정통밀교의 수립
총지종 창종 이후 원정 대성사께서는 진각종에서의 교리적, 행정적 착오를 반성하시고 정확한 인계, 엄격한 의궤와 사종수법을 비롯하여 교상(敎相)과 사상(事相) 면에서 완벽한 체계를 갖춘 정통밀교의 확립에 노력하셨다. ‘즉신성불’과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기치로 밀교의 대중화에 진력하셨다. 한국 현대밀교사상 최초로 삼매야계단(三昧耶戒壇)과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열어 관정식(灌頂式)을 베풀고 정통밀교를 전수할 아사리(阿闍梨)를 배출하셨다.
대성사께서는 해방 이후 한국에 ‘밀교’라는 용어와 개념을 최초로 도입하셨을 뿐만 아니라, 총지종과 진각종이라는 현대 한국밀교 양대 종단의 산파 역할을 하심으로써 1980년 9월 8일 입적하실 때까지 현대 한국밀교사의 수립에 견인 역할을 하셨다. 대성사의 일대기와 현대 한국밀교사의 궤적이 일치한다고 평가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대성사의 사상은 『종조법설집』에 잘 나타나 있다. 총지종의 소의경전인 『대승장엄보왕경』,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을 번역하여 발간하셨으며, 이 밖에도 대장경의 핵심을 모은 『불교총전』 등을 편찬하셨다. 여기에 교화의 방편으로서 준제법을 주축으로 삼고 증익(增益)·식재(息災)·경애(敬愛)·항복(降伏)법 등의 사종수법(四種修法)을 채택하였으며, 아사리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의 밀교 비법과 관법(觀法)을 소의경전에 의거하여 마련하셨다.
밀법 홍포의 대원을 부촉하다
창종한 지 만 7년, 교세는 요원의 불꽃처럼 일어나 본산인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총지사를 비롯하여 전국 30여 개소에 사원이 개설되고, 행정기관인 통리원과 함께 교리적인 면을 뒷받침한 연구기관으로서 법장원이 신설되었다. 교도의 참여와 신행 활동을 돕기 위하여 신정회가 결성되었으며, 각종 교전이 편찬되었다. 이와 함께 대성사께서는 ‘처처불공 시시불공(處處佛供 時時佛供)’을 강조하시며 모든 불사와 식순을 간소화함으로써 어려운 밀교수법의 대중화에 진력하시면서 대중에게 심오한 밀교의 비법을 쉽게 열어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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