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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것은 자유自由를 본질本質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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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13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12-01 신문면수 6-7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읽는종조법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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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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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12-15 15:34 조회 23회

본문

마음이란 것은 자유自由를 본질本質로 한다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3절 각종 논설


13. 마음이란 것은 자유(自由)를 본질(本質)로 한다.


비유(比喩)하면 뜻과 같이 안될 때는 마음이 항상 편하지 않다. 그런데 소인(小人)은 망심(妄心)으로서 자유(自由)로 하고 성인(聖人)은 본심(本心)으로서 자유(自由)로 한다. 중생(衆生)과는 정(正)히 반대(反對)이다.


자존심(自尊心)의 자유(自由)는 독재(獨裁)

탐심(貪心)의 자유(自由)는 간인(慳悋)과 도탐(盜貪)

향락(享樂)의 자유(自由)는 타락(墮落)

진심(瞋心)의 자유(自由)는 폭행(暴行)과 살생(殺生)

아집(我執)의 자유(自由)는 반항(反抗)과 자존(自尊)

언어(言語)의 자유(自由)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說), 악구(惡口) 비방(誹謗)


이런 것들을 행(行)할 때는 쾌(快)한 것 같겠지마는 행(行)한 후(後)에는 불쾌(不快)한 것이다. 본심(本心)의 자유(自由)는 망심(妄心)을 억제(抑制)하는 까닭에 행(行)할 때는 불쾌(不快)하나 행(行)한 후(後)에는 쾌락(快樂)하며 선자(善者)는 재화(災禍)를 초래(招來)하나 후자(後者)는 복덕(福德)을 얻게 된다. 이것들은 같지 아니한데 있는 것이고 진심(瞋心)과 망심(妄心)이 다르므로 그렇게 되느니라.


* 부처를 알고 자고 부처와 같이 일어난다.

*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 [인간세계(人間世界) 각종(各種) 유정세계(有情世界) 각성신세계(各星辰世界) 각자이상세계(各自理想世界)]

* 선악(善惡) - 인간본위(人間本位)인데 기타중생(其他衆生)이 악(惡)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주관(主觀)은 선(善)인데 객관(客觀)에 악(惡)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섣부른 자유는 방종과 타락을 부른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당장은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뒷맛은 찜찜하다. 잠시 상대를 이겼다고 여긴들 과보는 어쩌지 못한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솔직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치사하기 이를 데 없고 음흉하기까지 하다. 늘 환하게 미소 짓지만 가식적일 때도 적지 않다. 앞에서는 수긍하고 칭찬하면서도 속으로는 별생각을 다 한다. 변덕도 심하다.

꿈은 더하다. 때로 잔인하고 폭력적일 때도 있다.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엉뚱한 사람과 얽혀 싸운다. ‘가시나무 새’의 노랫말처럼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갈피를 잡기 어렵고, 어둠과 슬픔도 무성하다. 타인을 품는 건 고사하고 나 자신이 쉴 곳도 이 마음 안에 별로 없다.

그럼에도 어떤 날은 먼 나라의 참상에 가슴이 저리고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비보에 마음이 아프다. 오지랖이 넘친다 싶게 지레 나서서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요리조리 계산하지 않고 선뜻 보시할 때도 종종 있다. 아주 가끔은 세상과 사람을 모두 품을 것처럼 가슴이 활짝 열려 더없이 맑고 가볍다.

우주를 안을 만큼 한없이 넓다가도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이 좁디좁은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내가 딱 그렇다.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갈 때면 조울증인가 싶기도 하고 이중인격자 같기도 하다.


예로부터 수많은 철학자와 종교인이 인간의 본성을 탐구했다. 인류학자도 진화 과정에서 이기심과 이타심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연구하는 걸 보면 우리는 본래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공동의 관심사인 것 같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부처의 성품인 불성이 있다고 했다. 그것을 발견하고 구현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거울에 낀 먼지와 때를 닦듯이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기본이라면, 본래 맑고 밝으니 본성으로 바로 들어가라고도 한다. 방법은 달라도 목표는 같다. 모두가 지닌 부처의 성품을 어떻게 찾고 가꾸고 꽃피울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원정 대성사는 『금강경』을 주석한 중국 부대사의 게송을 제시하셨다. “부처를 안고 자고 부처와 같이 일어난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부처는 어디에서 출현하는지 부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함께 일어난다. 서고 앉을 때 늘 따라다니며 말하고 침묵할 때 함께 한다.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흡사 몸을 따르는 그림자와 같다. 부처가 있는 곳 알고자 하는가? 소리 내어 말하는 바로 이것이로다.”

원정 대성사는 이를 화두로 던져 주셨다. 내 안의 부처를 찾으라는 말씀이자 지금 당장 부처님처럼 살아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부처님께서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아무나 되면 벌써 다 성불했게?” “사람에겐 근기가 있는데 나란 사람은 이번 생에는 어렵지 않을까?” “나 같은 중생이 무슨…….” 이런 생각이 바로 중생심일 것이다. 도에 다다르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고 겸손해서 하는 말 같지만 이러한 자기 비하에는 적당한 합리화로 세속적인 삶을 즐기고 싶은 속내도 숨어 있다.


진심과 망심은 그야말로 한 끗 차이다. ‘왜 저래?’하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고 ‘왜 그럴까?’ ‘무슨 일 있나?’ 걱정할 수도 있다. ‘그것 봐라.’ 하면서 무시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좋아.’ 같이 안타까워하고 도울 수도 있다.

그래서 원정 대성사는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본심은 그렇지 않은데 어째서 자꾸 악하게 흐르는 것인가? 자기 자신에게는 선하게 대하면서 타인에게 악한 것은 왜일까? 스스로는 선이라 여겨도 객관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는 무엇 때문일까?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질문하라고 하면 대개는 몇몇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손을 들곤 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은 질문할 게 없다. 외우기 바쁜 사람도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없으니 궁금한 게 없다. 질문을 통해 되짚어보고 걸러져야 진실로 나의 것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말했더라도, 혹은 권위 있고 전통 있고 훌륭한 누군가가 한 이야기라도, 스스로 사유하고 자신의 삶에 대입하고 증명하고 검증한 다음에 믿고 따르라 하셨다. 맹신과 도그마에 대한 부정이자, 왜 그런지, 정말 그런지, 현실과 자기의 문제로 끌어와 마음 깊이 확신이 서야 진실로 내 것이다.

불교의 진리와 나의 생각, 나의 언행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과 행동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 했다. 스스로가 부처임을 자각하고, 앉고 서고 눕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 부처로 살아야 한다지만 그 경지는 여전히 멀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본다. 부처님이 지금 바로 내 곁에 계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이런 경우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그렇게 자문자답하며 부처님의 안내를 청하고 짐짓 흉내라도 내보려 한다. 혼자 자고 혼자 일어나지 말고 부처님이 옆에 계신 듯 생각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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