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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식의 주인이 되어 ‘업’ 소멸 행복 해탈 누리며 반복 관행 정진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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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13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12-01 신문면수 8-9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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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12-15 15:37 조회 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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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식의 주인이 되어 ‘업’ 소멸 행복 해탈 누리며 반복 관행 정진하길

불교의 목적이자 인생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입니다.

고(苦)를 떠나 낙(樂)을 얻는 것입니다. 즉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행복은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까닭은 불교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가르침대로 살아서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대부분 성공하는 것, 건강한 것, 재물을 얻는 것, 명예를 얻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행복이란 우리의 가슴속에 일어나는 ‘긍정적인 정서’, ‘좋은 느낌’입니다. 성공, 건강, 재물, 명예는 행복의 조건이고, 그것이 이뤄졌을 때 우리 가슴 속에 일어나는 ‘좋은 감정’, ‘좋은 느낌’이 행복입니다. 그러니 행복과 행복의 조건을 구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더니 우리 가슴이 편안하고 평화로워졌다면 그 편안하고 평화로운 느낌,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연기(緣起)라는 존재법칙을 발견하시고 깨달으신 바대로, 그분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이 세상 존재계를 바람직한 관점(觀點), 정견(正見)으로 바라보면서 ‘나’라고 여기는 이 존재가 ‘연기적’, ‘무아(無我)적’ 존재임을 이해하고 깨달았을 때, 인식(認識)을 전환(轉換)하였을 때, 내 가슴속의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유념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연기적 관점’으로 풀이해 봅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숨 쉬고 있기 때문이고, 숨 쉬고 있는 것은 공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기는 나무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나무는 흙과 물과 햇볕이 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모든 것은 서로서로 관계 맺음으로써 존재하는 ‘관계성의 연기적 존재계’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연기법을 거듭 사유하고 반복 관행(觀行)하면서, 우리는 혼자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인(因)’과 ‘연(緣)’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니 이 세상을 바른 견해(見解), 정견(正見)으로 본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 긍정하는 감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도 수많은 인과 연의 조건으로 결합하여 생긴 것이니 조건과 상황을 살펴본다면 부정보다 긍정하는 이해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무아적 관점’으로 살펴봅니다.

우리는 늘 ‘나’라고 집착하고, ‘내 것이다’라고 애착하고, ‘내가 옳다’라고 고집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가 만나 잠시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해 사대로 각각 흩어져 사라지고, 마음도 조건과 상황에 따라 찰나에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독립되고 고정된 나라고 할 것이 없는 무아적 존재임을 반복 관행함으로써 ‘나다라고 할 것이 없네’ 하고 수긍하고 깨닫고, 또 깨달은 것을 거듭 깨달아 ‘나다’라는 습관적인 탐진치(貪瞋痴)에서 한 겹씩 벗어나면 자유롭고 행복 해탈한 세상을 누리게 됩니다. 습관적인 자아의식인 탐진치로 살 때와 연기적, 무아적 관점으로 전환하여 세상을 바라볼 때 느낌의 차이는 조금씩 달라지고 평화로워집니다.


이 마음과 의식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를 관찰하는 ‘의식의 전개 과정’이라는 좋은 방편법이 있어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의식(意識) 자체’로 있는 것입니다. 이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대상[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객체화하여 끌어오게 되어 있는데, 끌어오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멈추어 버리면 그냥 의식 자체로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아직 어떤 대상도 붙잡지 않은 상태로, 맑은 의식, 본래 청정한 본성품, 본바탕 의식 그 자체, 자성(自性)입니다.


두 번째는 개념(槪念) 이전의 ‘순수 감각 상태’로 있는 단계입니다. 우리 의식은 드디어 움직이면서 육근[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을 통해 무언가 계속 객체(대상)를 끌어오는데, 눈에 무언가 비치게 되고,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 물건이 무언가 내 앞에 보일 때, 무어라고 이름(개념) 붙이기 이전의 순수 감각 상태로 대상을 받아들이되 받아들이는 그 대상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그 상태로 무언가 모양이 비쳐오는‘구나’, 무언가 소리가 들려오는‘구나’ 하는 ‘구나 단계’입니다. 이 의식 자체로 순수 감각 상태에서 ‘무심한 평화로운 마음’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연기를 통찰(洞察)하는 단계입니다. 대상을 존재로 살펴보는 과정입니다. 모든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연기적인 존재입니다.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그렇게 존재할 만한 조건들이 있기 때문이니, 하나의 존재에만 집착하지 않고 이것이 이러할 때는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러하‘겠지’하고 이해하는 것이 연기적인 눈으로 보는 ‘겠지 단계’입니다. 이 단계부터 지적(知的) 작업이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관계 맺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연기적으로 통찰하는 단계’로, 연기적으로 살피는 것은 인식의 기초이고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누군가와 아픔을 겪으며 갈등했던 일을 떠올려 봅니다. 그 사람 탓만 하고 있던 내 마음이, 그 사람의 상황과 배경을 함께 살펴본다면 조금 달라집니다. 이렇게 연기적으로 살피게 되면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을 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여차저차하는 이유들이 있겠지’ 하면서 무거운 마음이 풀리면서 가볍고 시원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 네 번째는 긍정(肯定)으로 전환하여 감사하는 단계입니다. 우리 의식은 앞 단계에서 존재로 보던 것을 이제 가치로 보게 됩니다. 앞에 대상이 있으면 그 존재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치 평가로 시비, 선악, 미추, 즉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 밉다, 곱다 하면서 주관적으로 분별하여 봅니다. 불행한 사람일수록 긍정보다 부정으로 봅니다. 굳이 가치로 본다면 부정과 긍정에서 부정에 빠지지 말고, 긍정으로 향하면 자연히 감사하게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나눔입니다. 서로 교류하고 나눔으로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했습니다. 행복을 나누면 서로 상생(相生)하는 윈윈(Win-Win) 관계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식 전개 과정의 다섯 단계를 삶 속에서 적용해 봅니다.

첫 번째, 하루에 10초라도 의식 자체로 머물러 보는 힘을 길러 자성으로 고요함을 느껴봅니다.

두 번째, 개념 붙이기 이전 순수 감각 상태에 머무르며 보는 힘을 길러 무언가 모양이 비쳐오는‘구나’하면서 무심한 상태의 평화로움을 느껴봅니다.

세 번째, 어떤 상황에서든 연기적으로 통찰해서 이것이 이러이러할 때는 다른 것(이유)이 있기 때문에 이러하‘겠지’ 하면서 가볍고 시원함을 느껴봅니다.

네 번째, 부정 대신 긍정으로 전환해서 감사해 봅니다.

다섯 번째, 하루에 한 번 가족부터라도 서로 빙그레 미소 지으며 교류하고 나누며 따뜻함을 느껴봅니다.


이렇게만 해도 우리의 의식은 습관적인 탐진치, 즉 삼업(三業)에 끌려가며 업을 쌓는 삶이 아니라, 내 의식의 주인이 되어 업을 소멸하는, 보다 업그레이드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지금 여기 행복 해탈을 누리면서 반복 관행 정진합시다. 성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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