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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혜의 눈 | 허수아비와 무아, 그리고 법신·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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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동화교무 작성일18-08-07 15:11 조회9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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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혜의 눈

 

 

 

허수아비와 무아, 그리고 법신·화신

주체성 부족한 허수아비 같은 삶 벗어나려면

무아(無我)의 중도행 수행자가 법신이요 화신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여름 휴가철이 지만 급변하는 정세 속에 이래저래 어수선하게 느껴지는 시절이라 마냥 쉴 수만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우리가 한 생각 돌이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우리는 밀물처럼 다가오는 복잡다단한 일들에 마주치고 현장의 상존하는 고통들에 직면할 때 여유를 갖기가 쉽지 않다.

SNS 때문에 예전에는 모르고 넘어갔을 법한 일들도 고스란히 접하게 되니 피곤함까지 느낄 수 있다. 또 그러한 고통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하고도 뚜렷한 대책을 찾지 못할 때 무력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보통은 코앞에 놓인 일들을 처리하기도 바쁘다는 핑계 속에 그저 바라

보기만 하지는 않나 싶다.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진실이 밝혀지기를 그저 기다리거나 강요된 침묵의 분위기 속에서 원자처럼 고립된 상태에 있지는 않나 싶다.

삶의 욕구들이 생생하게 부딪히는 현실에서 과연 나는 어떠한 가치를 지켜내고있는지 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뚜렷한 판단을 가지고 응당 항거해야 할 상황도 있을텐데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도 많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사고를 하지 못할 때 우리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자기 목소리를 집단적으로 내는 시위 현장을 가보면 대개 목소리 큰 쪽이 이긴다며 외쳐대는데, 잘 보면 자기논리에 취해 상대를 규탄하거나 자기 뜻과 무관하게 남의 주장을 추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대가 때문에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위를 막는데 참여하기도 한다. “참 허수아비노릇하기 힘드네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허수아비라는 얘기를 들으니 불교의 무아(無我)’가 떠오른다. 무아의 행을 하

는 이는 자기 뜻을 벗어나 남에게 조종당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터이니 허수아비와는 한참 거리가 멀지 않은가. 그는 정견(正見)을 가지고 소신 있게 행동하는 양심일 것이다.

그런데 무아행이라고 할 때 꼭 자기생각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에 주목해야 한다. 대중이 원할 때는 자기이익을 내버리고 대중을 위한 일에 매진할 수 있다. 그럴 때는 허수아비라기보다 붓다의 화신(化身), 여래사(如來使)의 역할을 자임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얼마든지 내 입장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의 뜻을 따라줄 수 있다. 수염을 잡아채는 철없는 어린 손자에게 화내기 보다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할아버지를 보고 누가 허수아비 같다고 비난할 수 있는가. 자기이익을 고집하지 않고 상황에 순응하는 여유를 지닌 무아의 행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

흔히 중도(中道)는 양변을 여의는 것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양변을 껴안는다

고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하는 어느 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거문고의 느슨한 줄이 잘 조율될 때 나는 소리를 중도라고 할수 있지만 느슨한 줄이더라도 심지어 거문고 줄이 끊어졌을 때조차 나름의 훌륭한 음악을 창조해 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멋진 중도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하나의 입장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에 집착한다면 중도일 수 없음을 안다

면 배타적인 입장으로 흐르지 않는다. 자자와 포살을 통해 늘 기존 입장을 벗어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때는 허수아비의 옷을 뒤집어 쓴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 무아의 중도행을 수행하는 법신(法身)이요 화신(化身)이 아닐까 싶다.

 

김봉래(불교방송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