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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애(渴愛)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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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9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8-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단 서브카테고리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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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칼럼니스트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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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8-18 11:40 조회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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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애(渴愛)의 경계

불교, 욕망의 종류를 여러 가지로 구분

국가와 국가 간 갈등도 탐욕에서 비롯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동안 동서 냉전이 종식되고 세계질서가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어 안정적인 국제 질서가 세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위의 두 전쟁으로 미국과 유럽, 미국의 동맹인 일본과 한국, 이스라엘이 한편으로 묶이고 러시아, 중국, 이란 그리고 북한이 다른 한편으로 묶이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과 자국의 고질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관세를 인상하였다. 이러한 혼돈 속에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내란을 일으킨 혐의로 탄핵당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특히 특검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구체적인 사건의 내용은 논외로 하고, 관련된 종교만 들면 통일교, 일본의 종교인 천리교와 일련정종, 기독교가 거론되고 있다. 통일교는 기독교에서 파생되어 나온 신흥종교이고 캄보디아 이권과 관련이 있다. 기독교는 특히 극동방송의 사주이자 보수적 기독교의 대부라고 일컬어지는 김장환 목사가 채 해병 순직 사건과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담임목사도 압수수색을 받았다. 무엇보다 김건희 씨가 무속신앙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과 법사라는 불교 호칭을 단 건진 법사란 인물도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종교가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해관계의 연결고리를 매개로 불법적인 일에 개입했다. 특히 김장환 목사의 사무실을 압수수색 했다는 보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교리와 지향점이 다른 여러 종교가 개입된 것은 이해관계, 즉 인간의 탐욕을 전제하지 않고는 설명이 어렵다. 이처럼 서로 다른 여러 종교를 묶어준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탐욕(貪慾)이다. 사실 불교처럼 인간의 욕망 문제에 깊게 천착한 종교도 없다. 불교 궁극의 이상인 열반(涅槃, Nirvana)은 본래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아마 탐욕이라는 기준으로 종교를 나누면 불교와 여타 다른 종교로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생애의 의지, 즉 근본적인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부처님도 올바른 삶을 살아가려는 강렬한 욕망으로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는 욕망의 종류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갈애(渴愛, tanha)는 목이 말라 애타게 물을 찾듯이 하는 것을 말한다. 배고플 때 먹는 식욕은 당연하지만, 정도를 넘어 탐닉하는 경우를 갈애라고 한다. 그칠 줄 모르는 이러한 탐욕을 대표하는 것이 애욕(愛慾)이라고 한다. 이러한 갈애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기에 충족되지 않는 상태에서 노여움, 즉 진(瞋)이 터져 나오고 당연히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이를 치(癡, 어리석음)라고 한다. 이 탐진치의 가르침은 불교의 욕망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것이다. 이 욕망이 나오는 곳이 바로 신구의(身口意)인 것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기술혁신을 통해 자동화가 이루어져 생산성이 높아지고 풍요로운 생활이 가능할 것이라는 21세기에 오히려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특히 의학의 경우 AI(인공지능)의 발달로 임상실험을 대폭 줄어들어 신약 개발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되고 있으며, 효과적인 신약이 개발돼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고 있다. 아마도 평균 수명 백세시대는 21세기 안에 가능할 것으로 예측이 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여러 가지 불안 속에서 삶의 질을 논하게 되면 단지 수명만을 늘리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국가와 국가 간의 갈등을 단순하게 탐욕의 문제로 치환할 수 없지만, 근본 원인을 찾아가면 탐욕 내지 갈애라고 불리는 것과 만나게 된다. 그러면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욕망과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과 주변을 무너뜨리는 갈애의 경계는 어디일까? 그 경계를 객관적으로 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개의 경계 즉, 욕망과 탐욕의 구분은 수행을 통해서 체득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염불 수행을 선호한다. 옴마니 반메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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