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바로 보는 지혜와 헤쳐갈 힘 주는 부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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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9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8-01 신문면수 4-5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페이지 정보
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8-18 11:41 조회 3회본문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3절 각종 논설
9. 종교와 인생관
사람은 누구나 생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러한 생에 대한 태도 결정을 인생관이라고 한다. 인생관은 인간 각자의 주체적인 것이므로 인간 개개인에 따라 형형색색이다. 인간은 자기 나름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인생관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은 그 인생관이 무자각 무반성한 가운데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경우의 일이다. 이러한 인생관은 비교적 무가치한 평범 내지는 저속한 것에 속한다. 인생관이 평범하고 저속한 것일 때 그러한 인생관에 입각하여 영위되는 인생이 무의의한 것으로 끝맺게 됨은 명약관화하다. 그러므로 사려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무가치한 자연적 인생관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높은 인생관을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것에서 구하려고 한다. 철학과 종교에서는 모든 인생에 대한 문제들이 관능적 자연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지적으로 해석되고 평가되므로 철학적 종교적 인생관은 가치 실현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도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생관 형성의 법칙으로서는 첫째 현실 파악, 둘째 생의 평가, 셋째 목적 설정의 삼단계의 구조를 말한다. 즉 인간의 존재란 어떠한 것인가, 다음에 인간은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끝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인생의 어떠한 목적을 위하여 있는 것인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첫째는 인생의 실존성의 문제요, 둘째는 가치성의 문제며, 셋째는 목적성의 문제인 것이다.
전철을 타려고 지하철 계단을 걷다가 남들이 우르르 뛰어가면 덩달아 뛰게 된다. 놓치지 않고 타보겠다고 서두르지만 막상 다른 방향의 열차일 때도 많다. 횡단보도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앞사람을 쫓아가다 뭔가 이상해 고개를 들어 보면 정지신호여서 당황할 때도 있다.
다람쥐들이 밤나무 밑에서 놀다가 굵은 밤 한 톨이 떨어지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고 달려가니 이를 본 토끼며 사슴이며 늑대들이 무작정 같이 뛰었다는 우화는 맹목적인 우리를 꼬집는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고 세상이 정한 대로 살아간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살 것인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본 적 없거나 모르겠다고 손 놓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자니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고 이유도 모른 채 허탈하고 막막하다.
삶의 가치관은 많은 부분 부모에게 영향을 받는다. 구부정하게 걷거나 모로 쪼그려 자거나 미간을 찌푸리는 등 사소한 것까지 빼닮은 걸 보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이부자리부터 정리해라, 책상 치워라, 전기 좀 꺼라, 그렇게도 듣기 싫어했던 잔소리를 어느새 매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생물학적인 특성은 물론이고 말투며 행동은 여지없이 부모를 닮아간다.
그뿐인가? 종교는 거의 대부분 집안의 분위기에 좌우된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부모의 신앙에 젖어 들게 마련이다. 정치적인 견해도 비슷하다.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어느 쪽을 열렬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자연스레 따라 배운다.
가치관이 보다 넓어지고 가다듬어지는 건 학교에서다. 교육을 통해 다양한 사상을 만나고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철학교육이 부재해 삶과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할 기회는 별로 없다. 명언 몇 마디 주워듣는 게 고작이다. 종교교육 또한 단편적이라 자신의 종교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도 적고 타인의 종교를 충분히 이해할 기회도 없어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렇다고 인생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삶의 가치와 지향에 대하여 고민해본들 답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종종 욕심 버리고 살자 하다가도 모든 게 허망하고 부질없다는 생각에 이제라도 나를 위하고 현재를 즐기자며 또 다른 헛된 욕심에 젖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하루하루 주어진 대로 살아가기 급급했을 것이다. 파도에 휩쓸려 여기저기 떠밀리듯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을지 모른다. 많이 부족하고 때로 잊기도 하며 게으르기는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대 삼고 부표 삼아 순간순간 정신 차리고 가다듬을 수 있어 감사하다.
부처님 가르침은 일단 고통을 바로 보는 지혜와 견디고 헤쳐 나가는 힘을 준다.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을 때는 원망하거나 피하기 바쁘다. 모든 것이 연기로 이루어지니 고통 또한 곧,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사라진다는 믿음은 막연한 기대나 억지 희망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의 원인으로서 자신을 보라 했다. 번뇌와 고통을 유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갈애와 집착을 끊으라 했다. 많은 경우, 붙들고 되뇌고 전전긍긍하느라 번뇌와 괴로움은 주어진 상황보다 훨씬 커지고 길어진다.
행복 또한 언제든 바뀔 수 있으며 다른 여러 요인이 뒤섞여 있음을 보면서 자만하지 않고 감사히 받아들인다. 행복과 불행에 대한 지혜와 너그러움만 갖고 있어도 이 복잡하고 힘겨운 인생에서 엄청난 일 아닌가?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넌다”는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우리를 구원하는 명약이자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참구해야 하는 화두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게 인생이다. 너무나 짧아 한낮의 꿈과 같다고 한다. 얼마 전 드라마에서 법문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인생은 시와 닮아서 멀리서 볼 땐 불가해한 암호 같지만, 이해해 보리라는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비로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되지요.”
인생의 정답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의미를 찾고 가치를 만들어가면 그뿐이다. 다만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그 길에 서 있는 스승에게서 안개를 헤치고 갈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세상과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반야 지혜와, 해탈과 성불이라고 하는 목표를 가진다면, 꿈 같고 이슬 같고 물거품 같은 인생길에서 그래도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출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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