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란 천금 보다 귀한 의리, 가장 아름답고 완고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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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9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8-01 신문면수 6-7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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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8-18 11:43 조회 3회본문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수한 관계와 인연 속으로 들어섬을 의미합니다. 부모, 형제, 친척과 자식, 친구와 이웃, 그리고 사회와 국가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멀고도 가까운 인연의 사슬이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생겨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세상사 모든 것이 인연의 소치라고 했습니다.
특히 지금 시대는 멀기만 했던 지방과 나라가 모두 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무연(無緣)한 것처럼 존재했던 세상 인연이 모두 유연(有緣)한 관계로 다가와 세상은 가까운 한 이웃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는 부처님 말씀과 같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습니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설령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이 싫어 먼 산속이나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완전히 절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인간은 이 지상에 태어난 이상 인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누군가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피할 수 없는 이 인연의 질긴 사슬,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인연이란 한마디로 원인과 조건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 즉, 인연이 모여 성립했습니다. 따라서 인연이 모여 이룩된 온갖 현상은 독립자존(獨立自存)할 수 없고, 원인과 조건이 사라지면 그 현상 또한 사라지는 것이 인연의 속성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자법문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야. 온갖 현상은 다 자업(自業)의 인연의 힘으로 하여 생겨나느니라. 이 인연이 시시각각 머무르지 아니하여 번개 빛과 같거니와 인연 탓으로 온갖 사물이 생기고 인연 탓으로 온갖 사물이 없어지는 것이어서 인연을 떠난다면 업보도 없으리라.”
일반적으로 친구란 아주 오랜 기간 막역한 동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넓은 의미로는 ‘인생의 동반자’나, 나아가 ‘인생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인연’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체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인간의 삶에는 삶 그 자체로 필연적인 인연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중생은 늘 친한 것과 친하지 않은 것,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가려서 자신의 업이 좋아하는 것은 친근하게 대하고 싫어하는 것은 멀리합니다. 그런 까닭에 온갖 사랑과 증오가 생겨나고,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등의 온갖 병폐와 팔만사천 번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한마디로 자기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입니다. 중생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주는 사람은 싫어하고 혐오하고 미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중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익만 따져서 누군가의 친구가 되려고 한다면 그 사람과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 희생, 봉사, 자비, 인정 같은 아름다운 가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 따른 편 가르기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배려 대신 편견과 오만, 독선이 가득하고, 남의 생각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진정한 우정이 싹틀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혈육의 정마저 쉽게 저버리는 것이 요즘 세태입니다. 이익 앞에서는 부모와 형제를 배반하고, 윤리나 도덕,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도 내팽개치는 패륜 범죄가 날로 늘어나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봉양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늙은 부모를 내다 버리는 거나, 부모 재산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겠다고 형제끼리 칼부림을 서슴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 앞에서 ‘친구 간의 의리’라는 말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솔직히 현실감이 없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하천과 강이 오염되었다고는 하나, 깊은 산골 어디엔가 맑은 샘물이 남아 있기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희구하는 대로 어디엔가 맑은 샘물이 있듯이, 이 세상 어딘가에도 참다운 친구, 사람다운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희망이므로, 그 희망을 따라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정이란 ‘친구 간의 끈끈한 정’이라기 보다 ‘천금보다 귀한 의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명사는 인류의 덕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완전할 수 있는 것이 우정이라고 한결같이 찬탄했습니다.
‘의(義)’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올바름을 지키려는 정신으로, 인간이 지닌 가장 숭고한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거나, 우정을 위해서 어떤 어려움도 달게 받아들이는 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의리란 이처럼 자기희생을 통해 상대를 이롭게 해주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이익이나 즐거움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나눌 줄 아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일찍이 원효 대사께서는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처님처럼 존중해야 하며, 자신의 이익이나 즐거움을 능히 버릴 수 있다면 성인처럼 믿고 존경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우정은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언제나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멀리 달아나 모른 척하고, 이익이 있을 때만 가까이한다면 진정한 우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것이 우정을 이루는 첫 번째 도리라 하겠습니다.
참 우정이라면 친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을 위로하고 적극적으로 도우며, 내 일처럼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세상살이에 늘 좋은 일만 있을 수 없습니다. 친구가 어려움을 겪고 곤경에 빠졌을 때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힘닿는 데까지 도우며 세심하게 보살피는 것이 친구의 두 번째 도리입니다.
과거 일을 들추어 비난하거나 그 일로 곤란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친구의 세 번째 도리입니다. 실패했거나 불우했던 과거사를 들추어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현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지난 일로 마음에 부담을 주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오히려 친구의 장점을 칭찬해 용기를 북돋워 주고, 단점을 지적할 때는 상대방이 마음에 상처받지 않도록 사려 깊고 따뜻하게 말하는 것이 친구 간의 도리입니다.
친하다고 친구 사이에 예의를 차리지 않고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해서도 안 됩니다. 가까울수록 오히려 예의 없이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언사와 행동으로 선을 넘으면 그 우정은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친할수록 서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친구의 마지막 도리입니다.
『아함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질고 착한 이는 어떤 사람인가?
첫째는 그릇됨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니, 마음이 바르고 생각이 어질고 원(願)이 커서 능히 남의 그릇됨을 잘 분별하고 그치게 할 줄 아느니라.
둘째는 자비심이 있는 사람이니, 남의 이익을 보면 함께 기뻐할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보면 근심할 줄 알며, 남의 덕을 칭찬할 줄 알고, 남의 악한 행위를 보고 능히 자신의 악을 구제할 줄 아느니라.
셋째는 모든 세상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니, 남의 게으름을 방관하지 않고, 남의 재산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며, 남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지 않게 하고 조용히 훈계할 줄 아느니라.
넷째는 이익되는 일과 행동을 함께하는 사람이니, 자신의 몸과 재산을 아끼지 않고 공포로부터 구제하여 함께 깨닫기를 잊지 않느니라.
어떤 이를 악한 벗이라 하는가?
첫째는 두려움을 주어 상대방을 억누르려고 하는 사람이니, 먼저 주고 나중에 빼앗거나, 적게 주고 많이 바라거나, 사리사욕을 위하여 힘으로 친교를 맺는 사람 등이니라.
둘째는 감언이설이 많은 사람이니,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겉으로는 착한 척하면서도 비밀이 많으며, 남이 고난에 처하였을 때 구제하지 않거나 모른 척하는 사람 등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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