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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 기획특집 - 석가모니부처님과 룸비니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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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44호 발행인 법공 발간일 2003-05-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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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03 20:12 조회 1,6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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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 기획특집 - 석가모니부처님과 룸비니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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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4월8일은 부처님 오신날이다. 이 날은 공휴일로 지정되어 불자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이 날을 기리고 경축한다.

불교는 이제 아시아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자비와 평화의 메세지를 전하며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러한 불교를 처음으로 여신분이 곧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불교’는 글자 그대로 ‘불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불 이란 불타를 줄인 말로서 산 스크리트어 ‘버애쑈’에서 나왔다. 우리말로는 ‘부처님’이라고 하며 요즘은 원래의 발음 그대로 ‘붓다’라고 하는 경우도 많다. ‘붓다’의 원래 뜻은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다. 불교에서는 붓다를 ‘스스로 깨달음을 완성하고 다른 사람도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는[자각각타] 원을 지니고 그것을 완성한 분’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으로서의 최초의 붓다가 곧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석가모니부 처님을 석존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석가모니존을 줄인 말로서 온 세상 사람들이 받들어 모실만 한 훌륭한 분이라는 뜻이다.

2600여년전 북부 인도의 카필라국의 왕자로 태어나신 석가모니부처님의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였다. 후에 출가하여 깨달음을 열고 ‘붓다’로 일컬어졌고, ‘석가족의 성자’라는 의미에서 ‘석가모니’라고 칭해졌다. ‘고타마’는 ‘가장 훌륭한 소'라는 뜻으로 소를 신성시하는 당시의 일반적인 이름으로서 석가족의 별칭으로 추측되며 ‘싯다르타’ 는 ‘모든 것을 성취한 사람’ , 혹은 ‘일체의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석존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생노병사의 윤회의 고리를 끊고 깨달음의 지혜를 얻고자 29 세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6년 간의 처절한 수행 끝에 35세에 최고의 깨달음을 이루었다.

생, 노, 병, 사를 초월하는 열반은 고행과 쾌락의 양 극단에 의해서는 달성될 수 없음을 깨닫고 중도에 의하여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이 곧 연기의 이치이며 사제와 팔정도 등의 체계로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석존의 깨달음은 신의 계시나 독단적 영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철저한 사유와 추론의 궁극에서 이루어진 깨달음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진리로서 오늘날에는 모든 종교의 으뜸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석존의 가르침은 무조건 믿으라는 식의 맹신도 아니며 불합리한 것을 믿으라는 미신도 아니다. 항상 심신이 안온한 상태에서 지혜를 탐구하여 스스로 검증하고 체득할 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서구인들 에게까지도 받들어 모셔 지고 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에 바탕을 둔 종교 이기 때문에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식물 에게까지도 차별없는 사랑을 베푼다.

불교는 가르침을 전하는 과정에서 침략전쟁이나 종교전쟁을 한 예가 없다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는 서양철 학자들이나 신학자들 사이에서 불교의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교리가 모든 종교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신은 합리적이고 평화적이며 지혜의 깨침에 의하여 인류의 무명을 밝히고자 하는 위대한 가르침을 인류에게 전해준 일 대 사건이었다. 우리가 석가모니부 처님의 탄신을 봉축하는 것도 부처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다시 각성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탄생지-룸비니〉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는 최초의 설법지인 녹야원, 정각을 이루신 붓다가야, 열반지인 쿠시 나가라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로 손꼽힌다. 흔히 룸비니동산으로 불 려지는 이 곳은 현재 네팔의 영토에 속하며 인도 국경에서 약 20키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설산 히말라야의 위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지금은 동산이라기 보다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발굴과 복원작업이 아직도 진 행중이다. 룸비니라는 이름은 석존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친정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약 2600년전 석가족의 왕국인 카 필라성이 이 지방에 있었는데 룸비니는 그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부친인 슛도다나왕 (정반왕)의 부인 마야데비왕비가 산 달이 가까워지자 출산을 위하여 친정인 데바다하를 향해 길을 가던 중 그 일행이 카필라성과 콜리성 경계 부근의 룸비니동산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 때 백화가 만발한 꽃동산을 '거닐던 마야데비왕 비가 꽃이 만발한 무우수 나뭇가지를 잡는 순간 오른쪽 옆구리로 아기 부처님께서 탄생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그러나 룸비니동산은 부처님 이 탄생했던 장소라는 것 이외에는 그 어느 때도 크게 번창했던 적은 없었던 듯 하다.

이곳을 방문했던 신라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 의하면 8세기의 룸비니는 “숲이 무성하여 방향을 찾지 못해 헤메기 일쑤인데다 도적들 마저 출몰하는” 곳이었다고 한 다. 아마 불교의 중심권이 대승불교의 이동경로를 따라 인도에서 동북아로 옮겨짐에 따라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6년 인도 고고국에 의해 이곳이 발굴될 당시에 아쇼카왕이 세운 돌기둥이 발견됨에 따라 이곳이 룸비 니임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 계속적인 발굴로 구룡 못과 마야부인당의 탄생상 등이 발견됨으로써 부처님의 탄생지임이 확실해졌다고 한다.

1967년에 미얀마출신의 우탄트 피사무총장이 이곳을 순례한 후 그 보존상태가 너무도 허술함에 충격을 받고 각 국에 도움을 호소하여 기금을 조성한 후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 인근 일대의 정비작업과 개발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 네팔 측에 개발을 위한 기금이 전달되었지만 상당액이 사라져버려 개발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다 행히 현재는 네팔당국과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개발사업이 다시 재개되어 세계적인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B.C249년경 아쇼카왕이 이 성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석주와 함께 마야부인당의 탄생상과 구룡 못 등이 있다. 그리고 룸비니의 서쪽으로 키로 지점에 샤카족의 거성 이었던 카필라바스투(카필라성)가 있다. 룸비니의 근처에는 세계 여러나라의 사원이 세워져 있으며 최근에는 한국사찰과 중국 사찰도 세워 졌다.



아쇼카왕 석주

불교를 옹호하던 아쇼카왱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룸비니동산의 위치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발굴 당시에는 땅에 묻혀 있었다고 하는데 가운데 부분이 낙서 등으로 많 이 훼손되어 있다. 석주의 머리는 말모양으로 추측되며 석주에는 “즉위 20년에 신들이 총애하는 인자한 왕이 이곳을 방문하고 경배했다. 이 곳에서 샤카족의 성인인 붓다가 태어나셨기에”라고 새겨져 '있으며, 돌로 된 붓다의 형상과 석주를 세웠다고 한다.

석주에는 또 “세존께서 이 곳에 태어나셨기에 룸비니의 세금을 면제하고 생산물의 1/8만 납부하도록 한다.”라고 새겨져있다. 그리고 석주의 꼭대기 부분에는 ‘옴마니반메 움 이 티벳문자로 새겨져 있는데 이 것은 훨씬 뒷날 누군가에 의해서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마야부인당

마야부인당은 부처님의 탄생상이 조각되어 모셔져 있었는데 현재는 성역화 공사로 인해 탄생상이 그곳 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옮겨 보관중 이다. 이 탄생상은 태자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바른손을 들어 무우수 가지를 잡았을 때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자가 태어나는 순간을 새긴 것이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손되어 그 곁에 새로 만든 탄생상 이 함께 모셔져 있다.



구룡못

마야부인이 출산한 후 목욕을 했다고 알려진 구룡지는 기록에 의하  당시에는 “거울처럼 맑고 투명했으며 주위는 여러 가지 꽃들이 덮여져 있었다.”고 한다.

룸비니의 주변에는 파괴된 탑과 사원의 흔적, 골동품들이 있으며, 약간, 동쪽에는 두 개의 현대식 사원이 있는데 하나는 네팔의 Theravadin불교위원회가 세운 것이며 다른 하나는 Sakyapa분파의 티벳 사원이다.

〈자료제공: 법장원 연구원 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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