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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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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5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2-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도경스님의 수행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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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2-04 13:30 조회 1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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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9>
욕심’은 ‘화’보다 더 나 자신과 동일시되는 마음... 수행, 지혜를 일으킬 조건을 만들기 위해 하는 것

괴로운 느낌을 가져오는 마음을 나쁜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 마음들은 크게 욕심, 화, 어리석음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 마음들도 고유한 성질이 있어서 조건이 되니까 자연스러운 자신의 작용을 하면서 일어난 법입니다. 마음의 느낌이 좋지 않고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나쁜 마음이라고 합니다. <지난 호 중>



수행을 하면서 더 깊이 잠재된 화에 대한 이해를 한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활짝 깨어있고 알아차림이 계속 이어지면서 새로운 이해를 계속해 나갈 때였습니다. 하루는 알아차림의 힘이 아주 좋아져서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일어나는 첫 마음의 반응을 알 수 있었습니다. 법당에서 경행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벽, 나무, 새소리 등에는 마음이 계속 평온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달랐습니다. 법당으로 올라오는 수행자를 봐도 첫 마음은 화로써 반응하고 나와 같이 경행하고 있는 수행자를 봐도 첫 반응은 화의 반응이었습니다. 심지어 좌선하면서 가만히 앉아있는 수행자를 봐도 첫 마음의 반응은 화였습니다.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은 깨어있고 밝고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항상 화로써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살아오면서 다른 인간들로부터 수많은 고통을 받아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른 인간을 경계하는 마음의 경향이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마음에 화가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알았고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도 더불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화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아리야 성인들이 얼마나 위대한 분들인가에 대한 이해도 생겼습니다.

 

욕심


욕심은 화보다도 더 나 자신과 동일시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욕심을 보는 것은 화를 보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욕심은 기본적으로 나로 하여금 가지게 하고 먹게 만들려고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반찬으로 햄 구이가 나왔다고 해 봅시다. 젓가락을 가지고 집으러 갑니다. 그리고 항상 가장 맛있게 보이는 것을 집습니다. 욕심이 그렇게 시킵니다. 젓가락이 출발하기 전에 햄을 보면서 마음은 무엇을 집을지 이미 정해놓고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그것을 집으려는 마음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거’라고 말하는 마음의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너무 미세해서 보통의 사람들은 들을 수 없습니다. 의식표면에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하지만 의식 깊은 곳에서는 마음이 그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행동합니다. 

저녁 9시가 되었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같이 사는 누가 라면을 끓여왔습니다.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좀 먹자.’ ‘한 젓가락은 괜찮아.’ ‘내일은 휴일이야.’ ‘알아차림 하면서 먹으면 돼.’ ‘이게 내 인생 마지막 라면이야.’ 이런 말들을 하면서 자신을 유혹합니다. 별의별 이유를 대면서 먹기를 유도합니다. 그때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은 그 라면 맛이 지상 최고의 맛인 것처럼 여깁니다. 너무 맛있을 것 같아서 한 젓가락을 먹었습니다. 라면을 입에 넣는 순간 그 맛이 아주 평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욕심도 화와 같이 욕심날 상황을 과장합니다. 더 맛있게 생각하고 더 좋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사소한 나의 약점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나로 하여금 하도록 만듭니다. 이런 체험을 계속해 보십시오. 계속 욕심의 말을 듣고 욕심의 결과를 알아가게 되면 마음이 조금씩 욕심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욕심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면 욕심이 하는 말을 안 믿게 됩니다.


이런 욕심보다 더 깊이 존재하는 것은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심, 나의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 나의 믿음이 실현되기를 원하는 욕심입니다. 새벽에 가장 먼저 도서관에 도착한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한쪽 구석에 앉았습니다. 이 도서관은 1시간이 지나면 만석이 되는 도서관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자신 근처에 앉으면 화가 일어납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기에 두 번째 사람이 마땅히 앉아야 할 자리는 도서관을 반 잘라서 저 건너편의 자리입니다. 그는 그의 영역이 침범당했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가 사유해서 결론을 내리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스스로 상황을 바로 해석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과 관련된 상황에서 어떠한 판단을 할 때 가장 기본적인 판단기준은 욕심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따지면서 판단합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판단합니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실재 이성보다는 감정에 더 많이 좌우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와서 나와 관련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 내용이 내 욕심을 충족시키면 마음이 기뻐하며 들뜹니다. 그 내용이 내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불만족스럽고 화가 납니다. 어떨 때는 이성적으로 그 이야기의 유불리를 쉽게 알 수 없는 경우에도 마음은 아주 빠르게 마음의 느낌으로 자신의 판단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뿌리 깊은 욕심의 마음 작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어리석음


어리석음은 그릇되게 아는 마음입니다.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을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으로 알아줍니다. 어리석은 마음은 나와 가장 강하게 동일시되는 마음이기 때문에 다른 마음보다 훨씬 알기가 힘듭니다. 어느 수행자가 저의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어리석음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하기를 ‘지금 너의 마음이 어리석은 마음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공기 속에 살면서 공기를 모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기본적으로 어리석기 때문에 어리석음을 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나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세상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인 정보를 내가 가진 자료로 해석해서 그것들을 압니다. 그렇게 내게 알아지는 모든 것은 관념화된 해석들입니다. 그런 관념적 해석에 그것이 그것일 수 있는 실재하는 성품이 있다고 믿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어리석음입니다. 내가 아는 벽이 벽일 수 있는 고유한 성품이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아는 저 사람이 저 사람일 수 있는 고유한 성품이 있다고 믿습니다. 컵이 컵일 수 있는 고유한 성품이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실재하는 성품이 있다고 믿습니다. 실제 이런 것들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대상들일 뿐이고 내가 아는 것은 나의 관념화된 해석일 뿐입니다.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그것을 좋아할 수 있고 그것을 싫어할 수 있습니다. 나의 영역을 지키려 하고 영역이 침범당하면 반발합니다.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욕심과 화의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욕심, 화, 어리석음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있을 때 내 마음은 괴롭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까요? 이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수행해야 할까요? 이런 마음을 없애고자 하는 마음은 무슨 마음일까요? 이 마음이 바로 화입니다. 화로써 화를 없앨 수 있을까요? 불로써 불을 끄려는 것과 같습니다. 화로써 화를 없앨 수가 없습니다. 번뇌도 조건 속에서 자연스러운 자신의 작용을 하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날 만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일어난 번뇌를 그것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바르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바르게 지켜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고 이렇게 생긴 이해가 그 번뇌를 줄입니다. 지혜가 일어나면 그 지혜는 그런 번뇌들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바꿉니다. 이것이 지혜의 고유한 작용입니다. 


<다음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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