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인도 밀교의 마지막 전등, 와나라뜨나

페이지 정보

호수 255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2-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정성준 교수의 밀교 인물史

페이지 정보

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교수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2-04 13:54 조회 123회

본문

인도 밀교의 마지막 전등, 와나라뜨나

8세기 티베트의 티송데첸(742-797) 왕에 의해 인도불교가 정통성을 인정받은 후 나란다사의 승원제도와 역사, 문헌, 사자상승의 법통은 티베트에 전해졌다. 

12, 13세기 티베트는 인도의 스승들과 활발한 교류에 의해 이론, 수행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7세기 인도에서 시작된 방대한 불교교학과 수행체계의 적집화는 12세기 티베트에 이르러 비로소 5학(계율, 구사, 반야, 중관, 인명)과 현밀겸수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불교에 뜻을 두고 출가한 후 누구나 삼장의 바다에 빠져 헤매게 마련이고 오로지 수재만이 삼장을 섭렵해 요의에 통달하게 된다. 인도스승들의 자비에 의해 진언문과 인명학으로 시작된 간결화의 노력은 5백여 년의 시간이 걸려 도차제와 밀교수행으로 간소화되었으니 그 공덕과 이익은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와나라뜨나는 지공의 손자뻘 되는 승려이다. 왕자 신분으로 사다가라에 태어났고 부왕은 우다야끼르띠, 왕비는 꾸마리라고 하였다. 

와나라뜨나는 8세 마하짜이뜨야사원에 출가했는데 불전문학의 대가와 동명인 붓다고사와 수자따라뜨나를 계사로 수계하고 두 스승으로부터 일찍이 밀교를 배웠다. 와나라뜨나는 15세 전후해 중요한 대부분의 밀교를 익혔고 이후 「입보리행론」과 「유가사지론」의 문헌을 정밀하게 공부했다. 이후 스리랑카에 가서는 달마끼르띠로부터 계율을 배웠으니 밀교를 먼저 배운 후 현교, 계율을 차례로 익히고 당대의 스승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와나라뜨나는 깊은 선정에서 이미 입적한 샤와리빠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힌두의 대문법학자인 하리하라와 교유하였다. 와나라뜨나가 우루와사사원에 머물 때 관세음보살 석상으로부터 티베트로 가라는 계시를 받았다. 티베트에 가는 중 네팔에 머물렀고 역경사 실라사가라로부터는 보살계를 받고 무려 5년이 지난 후 비로소 1426년 티베트에 당도하였다. 와나라뜨나는 쫑가빠의 후원자와 팍모둑빠의 세력에 의한 위대한 인물들을 많이 만날 기회가 있었으나 역경과 통역의 인연을 만나지 못해 다시 네팔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네팔에서 밀교에 대한 중요한 관정들을 받고 그 전승을 새롭게 하였고, 이후 그의 명성을 비로소 알게 된 랍뗀꾼상팍빠와 라왕곌첸의 초청으로 다시 티베트에 들어가 비로소 통역관인 잠뻴예셰를 만났다. 그러나 티베트에서 팍모둑빠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지원을 받지 못하고 대신 챠끄라상와라딴뜨라에 대한 중요한 전승을 받고 다시 네팔로 돌아와 여기서 중요한 저술을 완성했다. 

이윽고 티베트의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었을 때 와나라뜨나는 비로소 수도에 초청되어 통역과 역경사들과 함께 자신의 학문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말년에는 네팔로 돌아와 많은 제자들에게 밀교를 전수하고 1468년 세수 85의 나이로 입적했다. 와나라뜨나는 티베트대장경 논소부에 23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대부분이 밀교와 관련된 것이었다.

와나라뜨나는 현밀을 교차하며 남긴 수학과 수행은 티베트의 풍운과 함께 뜻을 다 펴지 못한 것은 중국의 진제삼장을 떠올리게 하지만, 아사리가 활동하던 시기는 쫑카빠에 의해 겔룩빠의 토대가 다져지던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가 기여한 업적은 결코 적지 않다. 

쫑카빠의 제자 가운데 겐뒨둡이 초대 달라이라마가 되어 티베트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달라이라마 14세는 인도불교의 삼장과 나란다사의 존재로 인해 티베트불교가 존재하고, 인류 최고의 지혜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선언하였다. 예전 인도에 유학할 때 인도불교이 멸망 이유를 두고 힌두학자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인도불교가 티베트에서 다시 나란다의 승단과 전통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생명력과 가치를 여전히 보존했기 때문이다. 

만약 불교가 고유의 정신을 잃었다면 지금의 티베트는 외도와 무속이 뒤섞인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무슬림에 의한 나란다사의 방화와 대학살 이후 인도교단은 왕실에 의한 지원은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5세기에도 나란다사는 여전히 존재하여 나란다사 출신의 지공(指空, ~ 1363)화상도 고려를 방문하여 밀교에 능한 스승으로서 오늘날 그의 부도가 회암사에 전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