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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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12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11-01 신문면수 13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이상주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자유기고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11-10 15:17 조회 2회본문
멈춤
“나는 멈추었는데, 그대는 멈추었는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첫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단군의 탄생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이니 가장 중요하고, 그만큼 지은이의 소망과 세계관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어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는 예수교인들의 이야기나, 신과 인간이 결혼하여 영웅이 탄생하고 그들이 운명의 힘에 이끌려 세상을 다스렸다는 그리스인들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이 희망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미래가 신의 뜻이나 운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노력 때문에 만들어진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아주 명료하게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멋없이 읽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몇 단계로 나누고, 그 이유를 충분히 받아들이기 위해 나름 가능한 질문을 던져 보기로 하겠습니다.
환인(제석천)의 아들 환웅이 사람 다스리기를 원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아래로 내려와 살았다. 곰과 범이 사람 되기를 빌었다. 굴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삼가며 100일을 지내도록 지도했다. 범은 견디지 못하여 그만두고, 곰은 21일 만에 사람이 되었다. 환웅이 곰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 단군이 조선의 왕이 되었다.
곰과 범은 정말 동물이었을까? 곰과 범이 비유라면, 환웅과 곰과 범은 각각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곰과 범은 왜 환웅을 부러워했을까? 굴속 생활과 이전 생활은 무엇이 달랐을까? 범은 왜 마음을 바꾸었을까? 곰은 사람이 된 후에 이전 생활에 대한 그리움이 일지 않았을까? 환웅은 21일이면 될 일을 왜 100일 동안 하라고 했을까? 범도 사람이 되었다면 환웅은 범과도 혼인했을까? 곰과 범은 처음부터 암컷이었을까? 수컷들은 왜 사람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환웅은 왜 자신의 종족과 혼인하지 않았을까?
동물이 사람이 되는 이야기를 우화로 읽지 않고 그대로 읽는다면 비과학이 되고 요즘 시대에는 어린이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신과 기적의 이름으로 포장하여야 고개가 끄덕여지거나 기억하고 나눌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테고, 그래서 그런 모습으로 몇백 년을 전해올 수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환웅은 선진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고 곰과 범은 좀 뒤떨어진 방식으로 살던 사람들이었으며, 곰과 범은 좀 더 나은 기술을 배워 삶의 질을 높이고 싶어서 환웅에게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였다고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지금까지도 평등과 자유보다 계층적 구조와 지배적 관계를 선호하고 지식과 기술을 지배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지식과 배움의 경계를 허물고 평등과 자유를 일체 중생에게 베풀고자 하셨습니다. 환웅의 홍익인간 정신도 일연 스님이 보기에 부처님의 마음과 같아 보였던 듯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시하는 변화의 요건을 첫째 발심, 둘째 멈춤, 셋째 숙성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발심은 사람 되기를 비는 데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멈춤은 쑥과 마늘만 먹는 데서, 셋째, 숙성은 굴속에서 100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데서 나타납니다. 모든 요건이 갖추어져야 일을 성취할 수 있으니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특히 멈춤에 대해 좀 더 사유해 봅니다.
손가락 목걸이(앙굴리말라)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청년이 외도 스승과의 잘못된 인연으로 99명을 죽이고 마지막 한 명을 찾아다닐 때,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앞에 나타납니다. 부처님을 뒤따라가던 앙굴리말라가 “멈춰라.”라고 하자, 부처님이 “나는 멈추었는데, 그대는 멈추었는가?”하여 비로소 최면에서 깨어나고 자기 행동을 참회하고 부처님께 귀의해 새로운 삶을 삽니다.
100일의 기간 설정을 보더라도, 집중적인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기간인데 곰은 21일 만에 성취를 이루었으니 100일 되었든 21일이 되었든 문제는 기간이 아니라 기존의 습관을 멈추었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달라지느냐 마느냐에 있지, 얼마 만에 되느냐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달라진 순간부터는 새로운 습관으로 살지 이전 습관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이전 습관이 조금이라도 일어난다면 달라진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곰과 범의 다른 점이기도 할 텐데, 곰은 새로운 습관이 좋고 할 만한 것이었고, 범은 이전의 습관에서 살맛이 났던 것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선사의 문답, “참선은 왜 합니까?” “깨닫기 위해 한다.” “깨달은 뒤엔 뭘 합니까?” “참선한다.”라는 말도 그렇고, 일체중생은 시시각각 소원 성취하는 삶을 산다는 말도 그렇습니다. 술과 담배를 비롯한 취하는 삶의 습관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과 일체의 취하는 음식을 버리고 맑은 정신으로 사는 사람, 야식과 폭식 때문에 고민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사람과 그 습관을 떨쳐버리고 고민을 벗어난 사람, 사치와 허영에 빠져 낭비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과 공부와 사업 등 자아 성취에 열정을 쏟는 사람, 누구도 타인의 강요가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그 세계를 즐기고 있기 때문에 멈추지 않는다고 봐야겠습니다.
밀교 총지종의 삼밀관행 수행법은 멈춤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고, 그래서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마침내 즉신성불할 수 있는 수승한 법이 된다고 나름 해석해 봅니다. 서원당에 나오시는 총지종도님들은 모두 이미 발심하셨고, 기존의 습관을 ‘옴마니반메훔’에 멈추시고, 청정한 보리행의 새로운 습관을 즐기시는 뛰어난 분들이십니다. 이러한 맑은 인연 속에 있을 수 있음에 오직 감사의 마음뿐입니다. 옴마니반메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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