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우리 사원 우리 스승님 (서울 정심사)

페이지 정보

호수 32호 발행인 혜암 발간일 2002-03-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사원탐방 서브카테고리 -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25 08:29 조회 2,054회

본문

우리 사원 우리 스승님 (서울 정심사)
벽에 틈이 나면 바람이 들고, 마음에 틈이 나면 마가 들어온다.
56dccb84f81d9a1b7c529612bac16a48_1524612549_1085.jpg


신문발행일이 다가오면 신문 원고를 빨리 써서 종보를 제날짜에 발행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 허둥대기 시작한다. 이번호 우리사원 우리 스승님은 정심사를 정했다. 지방이 아닌 서울에 위치 한다는 편안한 마음과 또 시간의 촉박함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내가 처음 총지종과 인연을 맺어 총지사에 출근한날 진일심 스승님(당시 시무)과 매일 얼굴을 맞대고 심부름하고 특히 처음 들어 온 우리들에게 편안하게 대해 주셨던 기억에 진일심 전수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진일심 전수님은 한사코 취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보다 더 훌륭하고 수행력 깊은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을 취재해서 신문에 내야지 이제 갖 알에서 깨어난 새끼 수행자인 나는 자격이 안된다”고 거듭 거절하셨다.

염치 불구하고 또는 꾸지람들을 각오로 무작정 정심사로 발길을 옮겼다.

며칠째 추운 날씨가 모처럼 봄기운을 뽐내는 듯 화사하게 피 어나고 있다. 상반기 49일 진호국가 불사기간이어서 스승님을 찾아뵈었을때는 한참 불공중이었다.

서울 상봉동에 위치한 정심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지형이 날으는 봉황의 모습이어서 알을까기 위해 봉황이 막 날아와 앉는 모습을 하고 있는 곳에 사원이 위치하고 있다. 새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것이 봉황새이고 이런 봉황새가 알을 까기 위해 내려왔다는 것은 사원의 정기를 말해주고 있으며, 이런 곳에서 마음을 닦는 진언수행을 하면 좋은 일만 생기고 해탈을 예견해주는 곳이 정심사이다.

원정대성사의 혜안으로 이런 곳에 밀교 도량이 있으면 많은 사람이 진언수행을 하는곳으로 안성마춤이다는 생각에 사원을 신축하려고 당시 진각종에 계실 때 대지를 구입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대지가 넘어가고 정통밀교 총 지종단을 창종하시고 다시 대지를 구입하여 정심사를 세웠다. 이렇듯 여러 우여곡절 끝에 정심사가 세워졌으며 무엇보다도 원정 대성사의 마음과 정성이 녹아있는 사원이다.

정심사는 총지종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으며, 특히 원정님은 이런 정심사가의 수행과 인연으로 세워진 사원이다. 바를정 마음심 절사 사원의 이름처럼 바른 미음으로 수행하는 곳 또는 마음을 바르게 닦는 곳이다.

집안의 어른들이 일찍이 밀교와 인연을 맺어 진일심 스승님은 자연스럽게 진언을 접해왔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진언과 인연을 맺은 진일심 스승님은 수행의 길을 걸어왔다. 그 당시에는 총지종 창종전이기에 어쩌면 총지종의 역사와 창종의 정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으며 원정대정사를 비롯하여 여러 대덕 스승님의 가르침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진언수행에 순탄한 길만 걸었던 것도 아니다. 진각종에서의 여러 가지 좋지 못한 모습과 창종당시의 어수선함으로 인하여 3년여 동안 불공을 하지 않은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가고 결국에는 발길을 끊었다.

“벽에 틈나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든다” 했던가? 진언생활에 나태하니 집안에 우환이 그치지 않고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문득 원정대성사님의 가르침이 다시 불공과 진언에 인연을  맺었다. 하월곡동 진각종 본원을 세울 당시 원정님이 모든 공사를 하나하나 살피며 한치의 흐트럼이 없도록 공사를 감독하고 있었다.

당시 진일심 전수님 나이가 19세.

스승님은 한창 겁 없을 시절 원정님에게 질문을 하였다. “원정님 저는 그냥 있는데 주위에서 저를 자꾸 흔들어 놓습니다. 여러가지 않좋은 소리도 들리고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고 여쭈니 원정님은 허허 웃으시며 “하늘을 보고 침을 뱉어봐라. 그 침이 어디로 가는지 알거다”라는 가르침을 주시고 뒷짐을 하시며 여여히 자리를 떠나셨다

그때의 가르침이 문득 진일삼 전수님을 우매에서 깨우기 시작했다. 다시 벽룡사와 총지사에 불공을 열심히 하며 진언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본원인 총지사에서는 원정님. 복지화 전수님. 환당님. 청 담님. 록정종령님. 효강님등 대덕스승님이 거쳐하고 수행하고 있어 시봉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복지화 전수님의 요청으로 진일심 전수님은 총지사 처사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대덕스승님을 옆에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부터 시작된 고행 아닌 고행, 수행 아닌 수행은 진일심 전수님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특히 열반스승님이신 복지화 전수님의 가르침으로 스승의 길을 가겠다 마음을 다졌으며 복지 화 열반 스승님은 항상 “너는 스승으로 일하면서 내 얼굴에 욕칠 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당부는 항시 몸조심 말조심 뜻조심을 하게 된다고 한다.

물론 몸은 힘이 들고 꾸지람도 많이 들었지만 당시 스승님들의 눈푸른 수행과 호랑이같은 기개로 용맹정진하는 모습은 진일심 전수님의 가슴속 깊이 수행자의 상이 남아있다.

진일심 스승님은 후진양성과 인재양성 그리고 사람 냄새가 흠뻑 나는 사원을 만들고자 노력중이다. 불사중 가장 큰 불사는 사람 불사라 하였듯이 이것도 원정대성사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듯, 당시 원정님은 10여명의 학생을 손수 자비로 가르치는등 장학사업과 인재양성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인재양성에 종단의 각별한 관심을 부탁하였다.

특히 스승의 교육을 유난히 강조하신다.

‘스승은 헌신적인 책임과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하고 남의 과실을 지적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를 반성하고 참회하여 화합과 단결을 목표로 해야 한다’ 는 원정님의 가르침을 받들어야 한다.

부처님이 강조하신 차별없는 세상, 평등세상을 실현하기 위하 여 작은 일도 소중히 여겨 실천하는 스승의 모습, 부처님 제자로 서의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스승님은 인재양성은 사람됨됨이 사람냄새, 정을 유난히 강조 하신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래도 사람구실 못하는 똑똑이는 아 무 소용이 없으며, 약간 어눌해 보여도 사람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 사람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하신다.

사원의 운영도 자비심과 환희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항시 따뜻 한 모습을 하여 심신이 지친 교도들과 중생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심신을 안정시키고 재충전하는 곳이 되어야 총지종이 내세우는 생활불교와 불교의 생활화 실천하는 것이라 한다.

또한 교도들의 노력으로 총지종이 지금의 위치에 있을 수 있었다며 이후에 교도들에게 회향하는 사업을 하였으면 한다는 바램을 피력하였다.

진일심 전수님은 생전에 각자님과 같이 작지만 행복하고 편안 한 복지시설이나 양로원 혹은 전통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사원을 신축하고 싶은 것을 서원으로 삼고 있다. 





56dccb84f81d9a1b7c529612bac16a48_1524612540_0549.jpg  전일심 전수님



정심사 주교 진일심 전수님은 일찍 부터 밀교와 인연을 맺어 진언수행과 불공을 생활화하였다. 정식 스승 발령 은 3년 전에 되었으나 그 진언수행의 깊이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특히 종단의 큰 스승이셨던 복지화 전수님의 가르침은 스승의 길을 걷도록 하였으며 많은 큰 스승님을 시봉하였다.

, 전수님은 이제 살아생전 반듯한 사원을 자비로 건립하여 회향하고 싶다며 특히 복지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교도들에게 회향하는 사업을 마지막 불사라 여기며 오늘도 진언수행에 용맹정진하고 있다.

전수님의 따뜻 한 모습처럼 사원의 모습도 따뜻한 온기와 사랑이 넘쳐 교도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사원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알에서 막 깨어난 듯 조심스럽게 교도들에게 진언의 묘의를 전하고 있다. 마치 큰 뜻을 품고 승천하려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