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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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 사람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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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04-04 13:51 조회97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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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새벽에 가벼운 접촉사고를 당했다. 후진 주차를 하기 위해 잠시 멈췄던 내 차를 이미 주차해 있던 다른 차가 갑자기 튀어나오며 쾅! 격투기로 따지면 경량급 대 중량급이라고나 할까. 배기량 1,000cc도 안되는 나의 애마를 그 두 배가 넘는 큰 차가 들이받은 것이다. 운전한 지 30년이 다 돼 가지만 처음 당하는 사고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손발이 다 후들거렸다. 부딪히는 순간 느껴지던 충격파로 미루어 보아 어디가 깨지거나 찌그러졌겠다 싶었는데 걱정과 달리 조수석 앞 범퍼가 긁혔을 뿐 차체는 멀쩡했다.


 범퍼는 차체를 보호하는 장치인 바, 깨지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평소의 생각대로 툭툭 털어버릴 참이었는데 문제는 상대 운전자의 태도였다. 남의 차를 들이받아 놓고도 멀뚱히 선 채 미안하다는 기색조차 없이 강 건너 불구경이다. 놀라서도 아니고 염치가 없어서도 아닌, 뭐 그 정도쯤이야 하는 표정에 화가 날 수밖에.

이쯤 되면 감정에 날이 선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탕감해 주려던 마음을 접고 그의 휴대전화에 신호가 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 문제가 있으면 책임지겠다는 다짐도 받았다.


 운동을 마치고 나오니 때마침 사고를 목격했던 동료가 내 차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다. 범퍼의 긁힌 자국이 꽤 심한 것도 그렇고, 바퀴 둘레의 휠 하우스 커버가 꺾여 있어 안전에 영향이 있을 수도 있으니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보는 게 좋겠단다. 동료의 조언대로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 카센터에 들렀다. 별다른 이상은 없다는 주치의(!) 정비기사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깐, 충격 때문에 꺾인 휠 하우스 커버를 원래대로 밀어 넣어 주고, 빈 구멍 두 개에도 나사 같은 걸 꽂아 준다. 게다가 보기 흉한 범퍼의 흠집도 칠을 하는 게 좋겠으니 스프레이와 붓으로 된 차량용 페인트를 사 오라는 것이었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부터 내 차를 들이받은 중형차 운전자의 몰지각하고 몰염치한 행태를 성토할 참이다. 그런 사람이 글 한 줄 읽을 일이 있겠냐만(글이라도 한 줄 읽었으면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만), 바람결에라도 자신의 비열함을 전해 듣고 아이고, 내가 그랬네 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집에 돌아와 상대 운전자의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냈다. 대뜸 전화를 걸어 이러고저러고 한다는 게 내키지 않기도 했거니와 상대방에게도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도 크게 망가진 곳은 없다며 카센터에서의 일을 간단히 설명하고, 최저가 상품이 나와 있는 인터넷 쇼핑 사이트 사진과 함께 소액이지만 페인트 비용을 부담해 줄 수 있겠느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런데! 답이 없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 되던 날 다시 가부간 답을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감감무소식, 일주일이 지나도록 소 죽은 귀신이다. 문자를 읽은 건 확실한데 하다못해 내 물음에 절대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답조차도 없으니 약이 오를 수밖에. 사람 속은 천 길 물속이라 했던가.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라야 사람이라는 속담이 저절로 떠오를 지경이었다.


 내 얘기를 들은 가족이나 친구들 모두 경찰서에 신고를 하라고 야단이었다. 모르쇠로 버티면서 작은 것에 목숨 거는 사람에게는 뜨거운 맛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이다. 블랙박스 영상에, 증거 사진도 찍어 두었겠다, 전화번호도 알고 있겠다, 문자 기록도 남아있겠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경찰서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상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그가 괘씸해서. 법의 제재야 받겠냐만 경찰서에서 와라 가라 하는 번거로움으로 그를 응징하고 싶어서.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는 대신 그에게 증거 사진과 함께 ‘매너가 사람의 품격을 말해 준다. 큰 차, 좋은 차가 곧 그 사람은 아닌 것 같다.’라는 문자를 보내는 것으로 그 일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하찮은 일 때문에 머릿속은 뒤죽박죽, 마음에도 날카로운 가시가 돋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불쾌한 기억을 싹 털어 버리고 평온을 되찾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주차장에 즐비한 차를 살피면서 같은 차 같은 번호를 찾고, 길거리에서도 같은 차종만 보면 의혹의 시선을 거둘 수가 없으니 이것도 참 중병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의 예의나 책임감조차 보여 주지 않았던 그가 후안무치한 이 일을 마치 무용담처럼 떠벌리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열을 받게 되니 말이다. 내가 옹졸한 건지 마음의 소용돌이가 가라앉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모양이다.


 특별히 아량이 넓지는 않지만 만약 그가 미안하다거나 돈이 없어서 성의조차 표시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답을 보내왔다면 나는 아주 선선히 괜찮다, 부담 갖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내가 분노하는 건 그의 뻔뻔스러움이다. 어쩔 수 없이 전화번호를 알려 주면서도 속으로는 얼마나 코웃음을 쳤을 것이며, 문자쯤이야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얼마나 의기양양했을지. 그런 일이 단지 그 한 사람만의 문제이겠는가. 너야 먹든 굶든 내 배부르면 그만이고 네 것도 내 것이다, 양심이 밥 먹여 주냐며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부류가 좀 많은가 말이다.


 하지만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건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혹시 ‘본받고 싶은 간부’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2~3년 전쯤 모 공무원노동조합에서 말 그대로 본받고 싶은 간부에게 준 이 상은 ‘소중한 인연’상, ‘손 맞잡고 걸어온 그 길’상, ‘나와 너, 그리고 우리’상, ‘행복 바이러스’상 등 수상 부문부터가 따뜻하다. 세세한 감사의 정을 듬뿍담은 상패의 내용도 뭉클하다.


 예를 들자면 ‘소소한 일에도 눈물짓는 당신의 따사로운 마음이 있어서 우리 문화 가족은 이를 위안 삼으며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손 맞잡고 걸어온 그 길 상)’, ‘두툼한 다운점퍼보다 따스한 벙어리장갑보다 포근한 말 한마디가 더 그리운 이때 선후배 틈에서 모나지 않게 앞장서서 이끌어 준 당신, 늘 힘이 됐다.(나와 너, 그리고 우리 상)’와 같은.


 본받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누군가의 한 마디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다른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누군가의 무책임한 행위가 다른 누군가를 깊은 불신의 늪에 빠뜨리기도 하는 각박한 세상에서 그 어둠을 밝히는 건 ‘미안해’와 ‘고마워’의 공존,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공감과 나눔일 것이다.


 한 번 더 몽니를 부려 보자. 어떤 미사여구로 합리화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한 사람은 그의 몰염치를 알고 있으니, 그 한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다. ‘남의 바르지 못한 점을 탓하지 말고 남이 무엇을 하든 참견하지 말며 다만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만을 생각하라’라는 법구경의 말씀대로라면 맞다. 툭툭 털어 버리지 못하는 나도 도긴개긴, 나 역시 무례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