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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딤돌 | [속담으로 보는 불교]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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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04-04 14:18 조회9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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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한 길’은 사람 키 정도의 길이에 해당한다. 사람 키의 천 배가 되는 깊은 물속이라고 해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잠수해서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키가 한 길에 불과한 사람의 마음속은 남이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을 그 겉모습이나 표정, 시늉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남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감정이 있는지 어지간히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그대로 알 수는 없다.


 이 속담의 교훈은 불교수행에도 적용된다. 누군가 수행을 통해 어떤 경지에 올랐을 때, 그가 체득한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남이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아라한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잡부雜部 니까야의 자설경(Udana) 가운데 『밧디야경 (Bhaddiya Sutta)』을 보면, 사리불이 갖가지 방편으로 난장이 밧디야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를 목격하신 부처님께서 밧디야는 이미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아라한이라고 훈계하시는 장면이 있다.


 사리불은 난장이 밧디야가 아직 더 공부를 해야 하는 유학위有學位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 범부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렇게 아라한조차 다른 아라한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서 보듯이 부처님만은 한 길 사람속도 아신다.


 탐욕, 분노, 교만, 우치와 같은 모든 번뇌를 제거하여 아라한이 되면 다음과 같이 자증自證의 오도송을 노래한다. “나의 삶은 다했다. 청정한 행은 이미 세웠고, 할 일을 마쳤으니, 내생의 삶을 받지 않을 것을 나 스스로 안다.” 윤회 속에서 수없이 탄생하던 일이 현생에 막을 내리고, 청정하게 살면서 모든 수행을 다 마쳤으니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나 스스로 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내가 좋아하는 이성과 섹스를 하고(음욕), 맛있는 것 마음대로 먹고(식욕), 큰 부자가 되고(재물욕), 밉거나 싫은 사람을 욕설로 제압을 하거나 쫓아버리고자 하는 마음(분노) 등의 감성적 번뇌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아닌지, 나 스스로 너무나 잘 안다.


 또, 세상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의문(우치, 사견)인 인지認知적 번뇌를 내가 모두 해결했는지 아닌지, 나 스스로 잘 안다. 수행을 통해서 이런 감성적 번뇌修惑와 인지적 번뇌見惑를 모두 제거했을 때, 더 이상 세상에 대한 미련이나 한恨 없기에, 내가 내생에 다시 태어나려고 할 리가 없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면 “내생의 삶을 받지 않을 것을 나 스스로 안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이런 자각을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 부른다. 예불문의 오분향례에서 노래하는, 부처님과 아라한이 갖추신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오분법신五分法身 가운데 마지막의 해탈지견이다. 내가 번뇌에서 해탈했다는 자각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나에게 음욕, 재물욕, 명예욕, 분노, 질투심과 같은 감성적 번뇌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고, 세상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의문 가운데 아직 풀지 못한 것이 남아있으면 나는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깨달았는지, 아닌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한 길 사람 속의 일이기 때문이다.